남간(南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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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생년 미상~1440년(세종 22).] 조선 전기 세종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집현전 직제학(直提學)이다. 본관은 의령(宜寧)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병조 의랑(議郞)남경문(南景文)이고, 어머니 온양방씨(溫陽方氏)는 고려 중서성 사인(舍人)방순(方恂)의 딸이다. 개국공신(開國功臣) 영의정남재(南在)의 손자이고, 좌의정남지(南智)의 동생이고, 태종의 부마(駙馬) 남휘(南暉: 세종의 매부)의 동생이다.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의 증조부이고, 남이(南怡) 장군의 종조부(從祖父)이다.

세종 시대 활동

1419년(세종 1)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여, 음보(蔭補)에 임명되어 형조 좌랑(佐郞)⋅사헌부 감찰(監察)에 이르렀다.

1427년(세종 9) 친시(親試)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들고 관력이 있었기 때문에 바로 사간원 좌정언(左正言)에 임명되었다.[<문과방목>] 그 뒤에 사간원에서 부사정(副司正)성규(成揆)의 전직(前職)을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다고 하여, 사간원 전체 간관(諫官)들이 모두 파직당할 때 좌정언남간도 함께 파직되었다. 그때 성규(成揆)가 거짓으로 사정(司正)이라고 자처하여 말썽을 일으켰으나, 친척인 우정언성자량(成自諒)이 발의(發議)하지 말도록 사간원 동료들에게 부탁하였으므로, 사간원에서 발론(發論)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세종실록』 9년 8월 4일 2번째기사]

1430년(세종 12) 예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었다가, 사헌부 지평(持平)으로 옮겼다.

1431년(세종 13) 호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어 공법(貢法)을 제정할 때에 전품(田品)을 9등(等)으로 구분하여 징세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해 다시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다.

1432년(세종 14) 병으로 휴가를 받아서 강화도의 온천(溫泉)에서 정양하는 중에 정포만호(井浦萬戶)도대평(都大平)으로부터 생선과 해물 등을 선물로 받은 것이 문제가 되었으나, 좌대언김종서(金宗瑞)의 변호로 일이 무사히 처리되었다.

1433년(세종 15) 사간원 우헌납(右獻納)에 임명되었다.

1436년(세종 18)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되었다가, 예문관 직제학(直提學)이 되었다. 사헌부 장령으로 있을 때 층청도·경상도·전라도의 가뭄이 매우 심하자, 장령남간이 아뢰기를, “충청도·경상도·전라도 세도의 한재(早災)가 너무 심하니, 말을 점검하는 점검원(點檢員) 보내는 것을 정지하고, 감사(監司)로 하여금 점고(點考)하게 하면, 백성들은 폐해를 받지 않고 마정은 제대로 잘될 것입니다.”하니, 세종이 말하기를, “그대가 말하는 것이 진실로 내 마음에 든다.”하고 칭찬하였다.[『세종실록』 18년 7월 22일 1번째기사]

1440년(세종 22) 5월에 세종이 남간(南簡)을 사간원 지사(知事)로, 강석덕(姜碩德: 강희안의 아버지)을 형조 지사(知事)를 겸임하게 하였는데, 남간은 세종의 매부 남휘(南暉)의 동생이었고, 강석덕은 세종의 이모부였다. 두 사람이 모두 이재(吏才)가 있었기 때문에 세종이 의친(議親)임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임명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남간은 몸이 약하여 한열(寒熱)의 지병을 앓고 있어서 대간(臺諫)의 관직을 맡아서 직무를 수행할 만한 자신이 없었다. 이에 예문관 직제학남간이 상언(上言)하기를“이제 신을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를 제수하시었는데, 신이 한열(寒熱)이 오가는 병이 날로 더욱 심해져서 종사(從仕)할 수가 없습니다. 청하건대, 신의 직책을 해면하여 주소서.”하였으나, 세종이 윤허하지 않았다. 그 뒤에 세종이 남간의 지병이 심하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때 직제학남간이 다시 “신이 한열(寒熱)의 병을 앓아서 수십 일 휴가 중에 있는데 신을 지사간원사에 임명하였으나, 병이 낫지 않고 날마다 깊어져서 회복할 기미가 없으니, 신의 직책을 해면하여 주소서.”하고 청하니, 세종이 말하기를, “나는 남간의 병이 이렇게 심한 줄은 알지 못하였다.”하고, 이조에 사직서를 내려 보내 처리하도록 하였다.

그해 직제학남간은 한열(寒熱) 병을 앓다가 돌아갔는데, 남간은 죽음에 임하여 자기의 손톱과 발톱을 깎아서 모두 모아가지고 아들 남준(南俊)에게 주면서 관(棺) 속에 넣어 함께 묻어달라고 부탁하며 “이렇게 해야만 예를 다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용재총화(慵齋叢話)』 권3]

남간은 성품이 깔끔하여 죽을 때 손톱과 발톱을 말끔히 깎았으나, 샤마니즘에서는 손톱과 발톱을 관 속에 함께 넣어주면, 천도(薦度)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청렴하고 정직하며, 행동이 단아하고 성실하여, 바른 도리를 지키고 남에게 아첨하지 않았다. 대간(臺諫)의 동료들이 그 절조(節操) 있는 행동에 감탄하여 말하기를, “남간은 언제나 풍헌(風憲: 대관)의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이다.” 하였다.[『세종실록』 22년 5월 20일 1번째기사]

1424년(세종 6) 1월 25일에 남간의 형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와 혼인한 정선공주(貞善公主)가 나이 21세의 꽃다운 나이로 돌아갔다. 정선공주는 태종(太宗)과 원경왕후(元敬王后) 사이에 태어난 4남 4녀 중에서 막내딸이었다. 세종은 막내여동생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말하기를, “왕의 누이[王妹]가 하가(下嫁)할 때에 자장(資粧)과 예물(禮物)이 진실로 왕의 딸[王女]보다 낫게 하는데, 어찌 그 초상(初喪)이라고 하여 도리어 야박하게 할 수 있겠는가. 일체로 경안공주(慶安公主: 태종의 3녀, 정안공주의 언니) 상장(喪葬)의 예(例)에 따르도록 하라.”하고, 세종이 또 말하기를, “공주의 주상(主喪)은 당연히 동성(同姓)으로 해야 할 것이나, 공주의 아들이 아직 어리니, 남휘(南暉)의 아우 사헌부 감찰(監察)남간(南簡)이 주장하도록 하라.”하고, 초상의 비용으로 정포(正布) 50필을 하사하였다.[『세종실록』 6년 1월 25일 2번째기사] 정선공주의 어린 아들이 남빈(南份)인데, 바로 남이(南怡) 장군의 아버지다. 이때 남간은 어린 남빈을 대신하여 정선공주의 주상(主喪)노릇을 하였기 때문에 남간의 집안은 남휘-남빈-남이 집안과는 각별하게 지냈다.

직제학남간은 스스로 청렴하고 검약(儉約)하다고 자처하며 평생 쇠고기를 먹지 않았다. 남간이 일가 젊은 사람들과 함께 정승 남지(南智)를 찾아뵈러 갔는데, 정승 남지가 일행에게 쇠고기를 대접하였다. 일가 젊은이가 묻기를, “직제학은 이것을 잡수시지 않는다는 것이 정말입니까.”하니, 정승 남지가 젓가락으로 고기로 집어 먹으며, “내 동생의 고집불통은 가소로운 일이다.” 하였다.[『용재총화(慵齋叢話)』 권3] 같은 피를 나눈 형제간이었으나, 남간은 맏형 남지와는 성격과 식성이 달랐던 것 같다. 좌의정남지⋅의산군 남휘⋅직제학남간 3형제의 어머니는 고려 중서성 사인(舍人)방순(方恂)의 딸인데,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지은 <파평군(坡平君) 윤공(尹公: 尹亥)의 묘지명(墓誌銘)>에 의하면, “장남 상호군(上護軍)윤호(尹虎)는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는데, 장녀는 중서성 사인(舍人)방순(方恂)에게 시집가고, 차녀는 각문 지후(閣門祗候) 남재(南在)에게 시집갔다.” 하였다.[『목은문고(牧隱文藁)』 권18] 이로써 보면, 남간의 아버지 남경문(南景文)과 어머니 온양방씨(溫陽方氏)는 이종 4촌간이었다.

1435년(세종 17) 7월에 세종이 남간을 조용히 불러서 아들 남준(南俊)의 혼사 문제를 물어보았다. 처음에 태종의 서출 제1왕자 경녕군(敬寧君) 이비(李裶)가 그 아들을 윤효동(尹孝童)의 딸에게 장가보내고자 하였는데, 윤효동이 그 혼사를 원하지 않았다. 경녕군이 세종에게 하소연하므로, 세종이 윤효동을 불러서 경녕군 아들에게 시집보내도록 종용하니, 윤효동이 임금의 말씀을 듣고 물러나서 도승지에게 말하기를, “제 딸이 병이 있고, 또 혼인을 정한 곳도 있습니다.”고 하였다. 윤효동이 집에 돌아와서 그 아우 영평군(鈴平君) 윤계동(尹季童)과 이 문제를 의논하였는데, 영평군 윤계동은 태종의 서출 제2옹주(翁主)와 혼인한 부마(駙馬)였다. 얼마 뒤에 세종이 또 윤효동을 불러서 혼인을 정한 곳을 물으니, 윤효동이 대답하기를, “의정부 사인(舍人)남간(南簡)의 아들이 이미 납채(納采: 신랑이 신부집에 예물을 보내는 것)했습니다.”하므로, 세종이 남간을 불러서 물으니, 남간이 대답하기를, “그런 일이 없었습니다.”고 하였다. 세종이 노하여 윤효동을 의금부에 하옥하여 국문(鞫問)하고, 곤장 1백 대를 때리도록 하였다.[『세종실록』 17년 7월 1일 3번째기사] 윤효동이 남간의 아들과 정혼하였다는 말을 꾸며댄 것인지, 아니면, 남간이 왕가(王家)의 혼인이므로, 납채하고도 물러선 것인지 알 수 없다. 왕실(王室)과 종친(宗親)의 혼사가 양반 사대부 집안보다 우선하였던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후손

부인 운봉박씨(雲峰朴氏)는 이조 판서(判書)박신(朴信)의 딸인데, 박신은 고려의 충신 정몽주(鄭夢周)의 제자였으므로, 남간의 절조(節操)와 검약(儉約)은 장인 박신을 본받은 것이다. 아들 남준(南俊)은 사헌부 감찰(監察)을 지냈고, 증손자 남효원(南孝元)은 충청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정평부사(定平府使)를 지냈고, 증손자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은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고산유고(孤山遺稿)』
  • 『구정유고(龜亭遺藁)』
  •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 『목은문고(牧隱文藁)』
  • 『미암집(眉巖集)』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 『용재총화(慵齋叢話)』
  • 『추강집(秋江集)』
  • 『향산집(響山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