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세찬(羅世纘)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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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나세찬 |
한글표제 | 나세찬 |
한자표제 | 羅世纘 |
분야 | 인물 |
유형 | 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중종~명종 |
집필자 | 이현숙 |
자 | 비승(丕承) |
호 | 송재(松齋) |
시호 | 희민(僖敏)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498년(연산군 4) |
사망 | 1551년(명종 6) 6월 14일 |
본관 | 나주(羅州) |
주거지 | 전라도 나주(羅州) |
묘소소재지 | 전라도 나주 평거면(平居面) 송림(松林) |
증조부 | 나계(羅繼)→(증) 사복시 정(正) |
조부 | 나은제(羅殷制) 현감(縣監)→(증) 승정원 좌승지(左承旨) |
부 | 나빈(羅彬); 생원(生員)→(증) 이조 참판(參判) |
모_외조 | 해평윤씨(海平尹氏); 찰방(察訪) 윤노겸(尹勞謙)의 딸 |
처_장인 | 담양전씨(潭陽田氏); 원종공신(原從功臣) 현감(縣監) 전대생(田大生)의 딸→(자녀) 3남 5녀 |
자녀 | (1자) 나척(羅惕); 현감(縣監) (2자) 나협(羅恊); 증(贈) 공조 참의(參議) (3자) 나열(羅悅); 참봉(參奉) (1녀) 김경덕(金景德)의 처 (2녀) 김천추(金千秋)의 처 (3녀) 부사(府使) 유몽정(柳夢井)의 처 (4녀) 찰방(察訪) 이황종(李黃鍾)의 처 (5녀) 지사(知事) 유염(柳濂)의 처 |
저술문집 | 송재유고(松齋遺稿), 병상부(病床賦)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나세찬(羅世纘) |
총론
[1498년(연산군 4)∼1551년(명종 6) = 54세.] 조선 중기 중종~명종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한성부 우윤(右尹)⋅사간원 대사간(大司諫)⋅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이다. 자(字)는 비승(丕承)이고, 호(號)는 송재(松齋)이다. 시호는 희민(僖敏)이다. 본관은 금성(錦城)이고, 출생지는 나주(羅州)의 거평면(居平面) 남산촌(南山村)이며, 주거지는 전라도 나주(羅州)이다. 아버지는 생원(生員) 나빈(羅彬)이고, 어머니 해평윤씨(海平尹氏)는 찰방(察訪)윤노겸(尹勞謙)의 딸이다.
중종 시대 활동
1525년(중종 20) 사마시(司馬試)에서 생원(生員)으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8세였다.[<사마방목>]
1528년(중종 23) 별시(別試) 문과의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1세였다.[<문과방목>]
1530년(중종 25) 나주의 훈도(訓導)에 보임되었다가, 1532년(중종 25) 황주(黃州)의 훈도가 되었다.
1534년(중종 29) 성균관 학유(學諭)를 거쳐서, 예문관 검열(檢閱)이 되었다.
1536년(중종 31) 문과 중시(重試)에서 예양책(禮讓策)으로 장원하였으나, 그 책문(策文)에서 권신 김안로(金安老)를 통렬하게 비판한 것이 문제가 되어, 경상도 고성(固城)으로 유배되었다.
1537년(중종 32) 김안로가 사사(賜死)되자, 소환되어 예문관 봉교(奉敎)에 임용되었다.
1538년(중종 33) 탁영시(擢英試)에서 장원을 차지하였다.[<문과방목>] 그해 예조 좌랑(佐郎)에 임명되었다가,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으로 옮겼다.
1539년(중종 34) 홍문관 수찬(修撰)으로 승진되었고,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다가, 병조 정랑(正郎)에 임명되었다.
1540년(중종 35)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다가, 홍문관 교리(校理)를 거쳐서 홍문관 응교(應敎)로 승진하였으며, 곧 이어 의정부 검상(檢詳)이 되었다.
1541년(중종 36) 퇴계(退溪) 이황(李滉)⋅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등과 함께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43년(중종 38) 홍문관 전한(典翰)이 되었다가, 사헌부 집의(執義)로 옮겼다.
1544년(중종 39) 이조 참의(參議)가 되었다가,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어, 중종을 도와서 세자(世子)를 둘러싸고 소윤(少尹) 윤원형(尹元衡)과 대윤(大尹) 윤임(尹任)이 벌이는 권력 투쟁을 중재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에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어, 젊은 인재를 양성하는 데에 힘을 기울였다.
인종 시대 활동
1544년(인종 즉위) 11월 선조가 갑자기 돌아가고 병약한 인종이 즉위하자, 대윤의 윤임 일파가 정권을 잡고, 사림파를 등용하기 시작하였다.
1545년(인종 1)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어, 사림파(士林派) 백인걸(白仁傑)⋅유희춘(柳希春) 등을 유배에서 풀어주고 등용할 것을 주장하다가, 체직되었다.
명종 시대 활동
1545년(명종 즉위) 7월에 병약한 인종이 돌아가고, 명종이 즉위하자, 소윤의 윤원형 일파가 정권을 잡고,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켜서 대윤의 윤임 일파와 사림파를 일망타진(一網打盡)하였다. 그러나 나세찬은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가, 한성부 우윤(右尹)에 임명되었다.
1547년(명종 2) 성절사(聖節使)에 임명되어, 중국 명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뒤이어 외직으로 나가서 충청도 관찰사(觀察使)가 되었다.
1548년(명종 3) 다시 한성부 우윤이 되었는데, 문소전(文昭殿)에 돌아간 인종을 부묘(祔廟)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소윤의 미움을 사서, 이듬해 1549년(명종 4) 전주부윤(全州府尹)으로 좌천되었다.
1551년(명종 6) 6월 14일에 부윤으로 재직 중에 전주 관아에서 갑자기 돌아갔다.
문집으로는 『송재유고(松齋遺稿)』가 있고, 시집으로는 『병상부(病床賦)』가 남아 있다.
성품과 일화
성품은 청렴하고 간이(簡易)하고 인자하고 후덕(厚德)하였다.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나이 겨우 12세 때 몸소 물고기를 잡거나 작은 산짐승을 사냥하여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부모를 봉양하였고, 부모의 상(喪)을 당하자, 3년 동안 산소(山所)에서 시묘(侍墓)살이를 하였다. 남과 시비를 가릴 때에는 사리에 매우 명석하였으나, 사람을 대할 때에는 화기(和氣)가 넘쳐흘렀으므로, 그를 한번 만나 본 사람들은 “안색(顔色)이 진한 술에 취한 사람과 같았다.”고 하였다.[행장] 남에게 빈말을 하지 않고, 반드시 깊이 새겨들을 만한 말을 하였는데, 모든 말이 유교의 경전(經典) 가운데에서 나오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조카들에게 경계할 만한 말을 곧잘 글로 써서 주었는데, 그 수백 마디 말의 요점은 성인(聖人)이 남긴 말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행장]
조정에 나가서 벼슬할 때, 항상 임금에게 충성하고 남에게 신의를 지키려고 애를 썼으며. 나랏일을 논의할 때에는 자기에게 불리하더라도 개의치 않고 과감하게 말하였다. 두 차례의 장원 급제로 말미암아 문명(文名)을 떨쳤는데, 그는 권귀(權貴)를 무서워하지 않고 서슴없이 탄핵하는 기개가 있었다. 그의 정직(正直)한 기풍이 간사한 자들을 조정에서 축출하는 데 더욱 드러났으며, 그의 강대(剛大)한 기개가 혹독한 형벌 속에서도 결코 좌절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당파싸움에 휘말리지 않고 만년을 보존하여 세상의 명신(名臣)이 되었다. 일찍이 종중(中宗)이 문정왕후(文定王后)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은 나라의 큰일을 맡을 만하다.”고 하였다. 그가 <을사사화(乙巳士禍)> 때에 화(禍)를 면하고 만년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문정왕후가 선왕(先王: 중종)의 뜻을 받들어 그에게 차마 중한 처벌을 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행장]
지방의 수령관으로 나가서 정사를 볼 적에는 청렴하고 후덕(厚德)하여, 그가 부임해 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그의 덕(德)을 칭송하였다. 일찍이 황해도황주(黃州) 훈도(訓導)를 지냈는데, 그에게 글을 배운 제자들이 그가 돌아갔을 때, 그의 초상화를 모셔 놓고 제사를 지냈다. 만년에는 전주부윤(全州府尹)으로 있다가, 재직 중에 관아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그가 세상을 떠나는 날 전주(全州)의 온 경내가 노소(老少)를 막론하고 마치 어머니를 잃은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흘리며 그를 애도하였다. 그가 저술한 시문(詩文)은 거의 다 유실되고, 시(詩) 몇 수 정도가 종갓집에 간직되어 있다. 문장이 매우 고상하여 문학의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그가 지은 시(詩)가운데 당시 사람들에게 회자(膾炙)되었다는 유명한 ‘병백부(病栢賦)’ 1편이 있는데, 중국 초나라 시인 굴원(屈原)과 그의 제자 송옥(宋玉)의 시풍(詩風)이 있다고 평가하였다.[행장]
묘소와 후손
묘소는 전라도 나주 평거면(平居面) 송림(松林)에 있는데, 한수재(寒水(齋)권상하(權尙夏)가 지은 행장(行狀)이 남아 있다.[『한수재집(寒水齋集)』 권34]나주의 송재사(松齋祠)에 제향되었다.
부인 기성전씨(箕城田氏)는 현감(縣監)전대생(田大生)의 딸인데, 슬하에 3남 5녀를 두었다. 장남 나척(羅惕)은 현감(縣監)을 지냈고, 차남 나협(羅恊)은 공조 참의(參議)에 증직되었고, 삼남 나열(羅悅)은 참봉(參奉)을 지냈다. 장녀는 사인(士人) 김경덕(金景德)에게, 차녀는 김천추(金千秋)에게, 삼녀는 부사(府使)유몽정(柳夢井)에게, 사녀는 찰방(察訪)이황종(李黃鍾)에게, 오녀는 지사(知事)유염(柳濂)에게 각각 시집갔다.
참고문헌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간재집(艮齋集)』
- 『강재집(剛齋集)』
- 『과암집(果菴集)』
- 『광뢰집(廣瀨集)』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금계집(錦溪集)』
- 『금호유고(錦湖遺稿)』
- 『기묘록보유(己卯錄補遺)』
- 『노봉집(老峯集)』
- 『노사집(蘆沙集)』
- 『동각잡기(東閣雜記)』
- 『면앙집(俛仰集)』
- 『목재집(木齋集)』
- 『미암집(眉巖集)』
- 『석천시집(石川詩集)』
- 『성담집(性潭集)』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송강집(松江集)』
- 『송재유고(松齋遺稿)』
- 『심석재집(心石齋集)』
- 『심암유고(心庵遺稿)』
- 『야계집(倻溪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연재집(淵齋集)』
- 『운암일고(雲巖逸稿)』
- 『월정집(月汀集)』
- 『인재집(忍齋集)』
- 『입암집(立巖集)』
- 『중봉집(重峰集)』
- 『지퇴당집(知退堂集)』
- 『충재집(冲齋集)』
- 『학포집(學圃集)』
- 『한수재집(寒水齋集)』
- 『해동잡록(海東雜錄)』
- 『향산집(響山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