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백다록(羅伯多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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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최초로 입국한 서양인 천주교 선교사로 1839년 기해사옥 때 새남터에서 참수당한 인물.

개설

나백다록(羅伯多祿)은 모방(Pierre Philibert Maubant)의 한자식 표기였다. 모방은 1831년에 파리외방전교회(Missions étrangères de Paris)에 들어가서, 1832년 중국 선교를 목적으로 마카오로 떠났다. 그곳에서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Bruguiere)를 만나서 조선 선교사를 자원하였다. 1836년 초에 조선교구 부주교의 자격으로 압록강을 통해서 조선에 입국해서 천주교 선교를 시작하였다. 1839년 기해사옥 때 참수되었다.

활동 사항

모방은 1829년 5월 13일에 사제 서품을 받고 신부가 되었으며 프랑스 비르(Vire) 인근에 위치한 데제르(Desért)와 샹뒤불(Champs-du-Boult)에서 보좌신부로 일하다가, 1831년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사가 되었다.

1832년 9월 11일 마카오에 도착한 모방은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서 머물며 중국어를 배우면서 사천성(四川省) 교구 선교사로 떠날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그곳에서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Bruguiere)와 지내면서 조선 선교를 결심하였으며, 사천성 보좌주교 폐로쇼(Pérocheau)의 허락을 받음으로써, 모방의 배속지는 조선으로 변경되었다. 그는 복건성(福建省), 북경(北京)을 거쳐서 타타르(현재 몽골) 지역의 서만자(西灣子)에 도착하였다. 그곳 교우촌에서 한문을 공부하면서 조선 입국을 준비하다가, 1835년 말에 조선 입국을 준비하던 브뤼기에르 주교가 병사하자, 1836년 1월에 단독으로 압록강을 건너서 조선에 입국하였다.

정하상(丁夏祥)의 도움으로 1월 15일에 서울에 도착(『헌종실록』 5년 8월 14일)한 모방은 한국어를 익히면서 서울·경기도·충청도의 교우촌을 순회 방문하고 미사, 세례, 고해성사, 혼인성사, 그리고 병자성사를 집전하였다. 1837년에는 조선인 신부 양성을 목적으로 김대건(金大建)·최양업(崔良業)·최방제(崔方濟)를 선발하여 마카오의 오문신학교(澳門神學校)로 유학시켰다(『헌종실록』 5년 8월 14일). 1837년에 샤스탕([鄭牙各伯], Jacques Honore Chastan) 신부와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 앵베르([范世亨], Laurent Joseph Marius Imbert) 주교가 조선에 입국함으로써, 그들과 함께 조선 내 교세를 확장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조선 정부가 1839년에 기해사옥을 통해 천주교도를 탄압하자(『헌종실록』 5년 3월 5일), 먼저 체포되었던 앵베르 주교(『헌종실록』 5년 8월 7일)의 권고로 모방은 충청도 홍주(洪州: 현 홍성)로 갔다가 그곳에서 관헌에게 체포되었고, 그해 9월 21일에 새남터에서 참수되었다(『헌종실록』 5년 8월 14일).

묘소

그의 시체는 20여 일 동안 새남터 모래사장에 버려져 있었는데, 교우들이 거두어 노고산에 안장하였고, 1843년에는 과천의 삼성산으로 옮겨졌다. 후에 1901년 명동성당 지하실로 이장되었다.

상훈 및 추모

1925년, 교황 피우스(비오) 11세에 의하여 시복 추대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하여 성인 추대

참고문헌

  • 아드리앙 로네·폴 데통베 저, 안응렬 역, 『한국 순교자 103위 성인전』 하권, 가톨릭출판사, 2013.
  • 한국가톨릭대사전 편찬위원회 저, 『한국 가톨릭 대사전』 4, 한국교회사연구소, 2006.
  • 김규성, 「19세기 전·중반기 프랑스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 시도와 서해 해로: 1830~50년대를 중심으로」, 『교회사연구』 32, 2015.
  • 조현범, 「모방 신부의 조선 전교」, 『교회사연구』 22, 2004.
  • 조현범, 「브뤼기에르 주교와 모방 신부의 관계에 대한 고찰」, 『교회사연구』 47, 2015.
  • 파리외방전교회 아카이브, Numéro: 396, Pierre Philibert MAUBANT (http://archives.mepasie.org/notices/notices-biographiques/maub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