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급(羅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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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52년(명종 7)∼1602년(선조 35) = 51세.] 조선 중기 선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이고, 증직(贈職)은 도승지(都承旨)⋅영의정이다. 자(字)는 자승(子升)이고, 호(號)는 후곡(後谷)이다. 본관은 안정(安定)이고, 거주지는 서울[京]이다. 아버지는 성균관 학유(學諭)나윤침(羅允忱)이고, 어머니 전주이씨(全州李氏)는 별좌(別坐)이원기(李元紀)의 딸이다. 성균관 전적(典籍)나익(羅瀷: 나식의 동생)의 손자이고, 형조 참의(參議)나만갑(羅萬甲)의 아버지이고, 해주목사(海州牧使)나성두(羅星斗)의 조부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76년(선조 9) 사마시(司馬試) 생원과(生員科)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5세였다.[<사마방목>] 음직(蔭職)으로 사직서 참봉(參奉) 등을 지냈다.

1585년(선조 18) 식년(式年) 문과에 갑과(甲科) 3등 탐화랑(探花郎)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4세였다.[<문과방목>] 상의원 직장(直長)에 임명되었다가, 한성부 참군(參軍)을 거쳐, 병조 좌랑(佐郎)⋅성균관 전적(典籍) 등을 지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날 때 한산군수(韓山郡守)로 있었는데, 그 뒤에 공주목사(公州牧使)로 옮겨서 난중(亂中)의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였다.

1596년(선조 29) 제용감 정(正)으로 있을 때 명나라에서 일본 왜군과 강화(講和)하기 위하여 명나라 유격(遊擊) 진운홍(陳雲鴻)을 부산(釜山)의 왜군 진영으로 파견하자, 그 접반관(接伴官)에 임명되어 접반사(接伴使)이항복(李恒福)과 함께 왜군 병영에 들어가서 강화 협정을 도왔으나,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강화 협상을 반대하였다.

1597년(선조 30) 사헌부 지평(持平)⋅사헌부 장령(掌令)⋅세자시강원 문학(文學) 등을 거쳐, 동지사(冬至使)김명원(金命元)의 서장관(書狀官)에 임명되어, 중국 명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그 뒤에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사헌부 장령(掌令) 등을 역임하였다.

1600년(선조 31) 평안도 평산부사(平山府使)로 나갔는데, 마침 그 고을의 아전이 농간을 부리자, 그 아전의 죄를 심하게 다스리다가 고발되어,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고향 경기 광주(廣州) 북방리(北方里)에 은거하다가, 1602년(선조 35) 병으로 고향집에서 돌아갔는데, 향년이 51세였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낙천적(樂天的)이고 아주 순수하였다. 평소 사람을 대할 때 오직 정직하고 유순할 뿐이었으나, 남과 옳고 그른 시비(是非)를 가릴 때에는 그 강직함을 누구도 따라갈 수 없었다. 사람과 사귈 때에는 피차의 간격을 두지 않고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면 마음을 열어 놓고 즐겁게 대하였다. 들판에 한 두락의 전답도 없었으므로, 집이 가난하여 끼니가 자주 떨어졌으나 태연하게 살았다. 또 서울에 몇 칸의 집도 마련하지 못하여, 조정에 벼슬할 때에 빌려서 살던 서울 집이 비바람을 가리지 못할 만큼 초라하였다.[신도비명]

1596년(선조 29)에 명나라 유격(陳遊) 진운홍(陳雲鴻)이 일본의 왜군과 강화(講和)하기 위해 부산(釜山)의 왜군 진영에 이르렀는데, 유격을 안내하던 접반사(接伴使)가 밤중에 도망해버렸다. 왜군이 매우 노하여 진유격을 구금해 놓고, 다시 조선을 침범하겠다고 위협하였다. 조정에서 이항복(李恒福)을 접반사로 삼고, 나급을 접반관(接伴官)로 선임하였다. 그때 나급이 공주목사로 있다가 어명(御命)을 받고 자기 집 앞을 지나면서도 들리지 않은 채 곧바로 대궐로 들어가서 임무를 부여 받았다. 당시 조정의 중론(衆論)은 형제도 없고 노모(老母)가 있는 나급을 차마 보낼 수 없다고 하였으나, 나급이 말하기를, “벼슬길에 나와서 임금을 섬기는데, 위험하다고 감히 어버이를 핑계대고 사양할 수 있겠는가.”하고 그날로 조정을 하직하고 적진(賊陣)으로 달려갔다.

접반사이항복이 경계 상에 머물러 있다가 나급에게 말하기를, “들은 바에 의하면 왜적이 이미 진유격을 죽였다고 하니, 상황을 보아가며 행동해야 할 것이다.”하니, 나급이 말하기를, “왕명을 받고 적군의 진영으로 들어가는데, 사생(死生)은 천명(天命)에 달려 있습니다. 어찌 여기에 앉아서 관망할 수 있겠습니까.”하니, 이항복이 충의롭게 여겨 시(詩) 한 수를 지어 전송하였다. 나급이 수행하는 집안의 종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는 것은 직분이지만, 너희들은 나와 같이 죽으면 무익하다.”하고 돌려보냈다. 부산을 점령한 왜군이 접반관나급이 온다는 말을 듣고 60리의 거리에다 군사를 포진하였는데, 시퍼런 칼날이 삼엄하였다. 왜군들이 접반관나급을 협박하여 유격 진운홍이 갇힌 감옥의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자, 접반관나급이 꾸짖기를, “나는 사신이므로 감옥의 문으로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다. 왜군이 접반관나급을 보니, 거동이 편안하여 조금도 두려운 기색이 없으므로, 그 뜻을 굽힐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병영의 정문(正門)을 열고 맞이한 다음에 곧바로 유격 진운홍을 풀어주고 예절로써 대우하였다. 이에 유격 진운홍이 왜군과 협상하여 강화가 이루어졌다.[신도비명]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 광주(廣州) 북방리(北方里) 건지산(乾芝山)의 언덕에 있는데,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가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이 남아 있다. 죽은 뒤에 <임진왜란> 때의 공로로 도승지(都承旨)에 추증되었고, 또 아들 나만갑(羅萬甲)의 공훈에 의하여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부인 광주김씨(光州金氏)는 한성부 참군(參軍)김호선(金好善)의 딸인데, 슬하에 자녀는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 나만갑(羅萬甲)은 진사에 장원 급제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형조 참의(參議)와 병조 참지(參知)를 지냈다. 딸은 사인(士人) 이문형(李文蘅)에게 시집가서 일찍 죽었다. 손자 나성두(羅星斗)는 유일(儒逸)로서 해주목사(海州牧使)를 지냈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간이집(簡易集)』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농암집(農巖集)』
  • 『문곡집(文谷集)』
  • 『서포집(西浦集)』
  • 『선원유고(仙源遺稿)』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송자대전(宋子大全)』
  • 『오산집(五山集)』
  • 『월사집(月沙集)』
  • 『응천일록(凝川日錄)』
  • 『청음집(淸陰集)』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택당집(澤堂集)』
  • 『하음집(河陰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