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약채(金若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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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 = ?] 고려 공민왕(恭愍王)~조선태종(太宗) 때의 문신.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과 충청도도관찰사(忠淸道都觀察使) 등을 지냈다.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거주지는 개성과 서울, 충청도 연산(連山) 고정리(高井里)이다. 아버지는 고려 정승 광성군(光城君)김정(金鼎)이며, 어머니 이씨(李氏)는 순안군(順安君)이방(李昉)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고려 때 군기감(軍器監) 판사(判事)를 지낸 김영리(金英利)이고, 증조할아버지는 고려 때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낸 김진(金稹)이다.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김약항(金若恒)의 형이자, 영의정김국광(金國光)의 고조할아버지이기도 하다.

고려 공민왕 ~조선 태종 시대 활동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거쳤다. 우왕(禑王) 때 대간(臺諫)의 좌사의(左司議)가 되어, 1388년(우왕 14) <조반(趙胖)의 옥사>를 다스리는 데 참여하였다. 당시 순군(巡軍) 상만호(上萬戶)염흥방(廉興邦)이 조반으로부터 모반(謀反)하였다는 자복을 받아내려고 참혹하게 고문하자, 염흥방의 세력이 무서워 누구도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이때 김약채가 홀로 고문은 불가하다고 주장하여 마침내 조반과 그 가족을 석방하게 하였다.[『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권33]

이에 최영(崔瑩)과 이성계(李成桂)가 손을 잡고 문하시중(門下侍中)이인임(李仁任)과 그의 심복 염흥방·임견미(林堅味)를 잡아 죽인 후 권력을 장악하였다. 염흥방이 죽자, 조야(朝野)에서 모두 통쾌하게 여겼다. 1388년(우왕 14) 명(明)나라에서 철령위(鐵嶺衛)를 돌려달라고 요구하였고, 이에 격분한 최영이 요동(遼東) 정벌군을 일으켰다. 이에 반대하던 우군(右軍) 도통사(都統使)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을 감행하자, 우왕을 모시고 있던 지신사(知申事)김약채는 이에 항거하였다. 이후 김약채는 이성계 일파에 의하여 외방에 유배되었는데, 이때 충청도 연산(連山)으로 이주하였다.

조선이 건국한 뒤에 고려에 충절을 지키는 유학자를 회유하자, 권근(權近) 등과 함께 조선 왕조에서 다시 벼슬하였다. 1400년(정종 2) 문하부(門下府) 좌산기(左散騎)로 있을 때 사헌부 대사헌권근과 함께 상소하여, “사병(私兵) 제도를 없애고, 병권을 모두 왕에게 집중해야 한다”고 역설하였고, 이에 국가에서는 <사병 혁파>를 단행하였다..(『정종실록』 2년 4월 6일) 1401년(태종 1)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고,(『정종실록』 2년 12월 1일) 1404년(태종 4) 충청도도관찰사(忠淸道都觀察使)가 되었다.(『태종실록』 4년 3월 10일) 이후 활동과 관련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1405년(태종 5)을 전후하여 세상을 떠난 듯 하다.

성품과 일화

김약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이 강직하여 강한 자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다.[『해동잡록(海東雜錄)』 권2] 1388년(우왕 14) 순군 상만호염흥방이 그의 종 이광(李光)의 목을 벤 밀직부사(密直副使)조반과 그의 가족을 체포하여 순군옥(巡軍獄)에 가두고, 위관(委官)·대간·전옥(典獄) 등과 함께 신문하였다. 이광이 조반의 집 재산을 빼었기 때문에 화가 난 조반이 이광의 목을 벤 것이다. 조반이 진술하기를, “6, 7명의 탐욕스러운 재상들이 사방에 종을 풀어서 남의 토지와 노비를 빼앗고, 백성들의 재산을 해치니, 이들은 큰 도적이다. 지금 이광을 벤 것은 오직 국가를 위하여 인민의 적을 제거하려고 한 것뿐인데, 어째서 나더러 반란을 꾀했다고 하는가” 하였다. 종일토록 고문하였으나 조반이 승복하지 않자, 염흥방은 더욱 참혹하게 치죄(治罪)하였다. 국문에 참여한 사람들이 염흥방의 세력이 두려워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때 좌사의이던 김약채가 일어나서 고문은 불가하다고 주장하여 마침내 조반의 목숨을 구하였다.[『고려사절요』 권33]

이때 문하시중 이인임의 일파인 염흥방과 임견미가 남의 토지와 노비를 빼앗아 횡포가 심하였으므로, 이 사건을 계기로 이성계와 최영이 손을 잡고 군사를 일으켜서 이인임과 염흥방·임견미를 모두 잡아 죽였다. 이것이 이성계 일파가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첫걸음이 되었다. 강한 자를 두려워하지 않는 김약채가 염흥방에게 항의하고 면전에서 바른 말을 한 것이 마침내 강직한 최영의 마음을 움직여서 용맹한 이성계와 군사를 협력하여, 고려 말의 막강한 권력자 이인임 일당을 제거하였던 것이다.

1400년(정종 2) 4월 조선에서는 사병을 혁파하였다. 사헌부 대사헌권근과 문하부 좌산기김약채 등이 함께 상소하기를, “병권(兵權)은 국가의 큰 권력이므로 분산하여 주관해서는 안 됩니다. 분산하여 주관하면 이는 칼을 거꾸로 잡고 남에게 자루를 쥐어 주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태상왕(太上王 : 태조)이 개국하던 초기에 특별히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를 설치하여 왕이 병권을 오로지 관장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병이 모두 없어지지 않아서, 사병을 거느린 자들은 도리어 선동과 난리를 꾀하여, 화를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부터 서울과 지방의 군마를 모두 삼군부(三軍府)에 소속시켜 국가의 군사로 만들어 체통(體統)을 세우고, 인심을 안정시키며, 양전(兩殿 : 태조와 정종)의 숙위(宿衛)를 제외하고 사가(私家)의 숙직(宿直)을 모두 금지하소서” 하였다.(『정종실록』 2년 4월 6일) <제 1차 왕자의 난>과 <제 2차 왕자의 난>이 가능하였던 것은 왕자들이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권근과 김약채의 상소로 조선 왕조는 사병을 혁파하고, 오르지 왕이 병권을 관장하게 하면서 마침내 왕조가 안정을 찾게 되었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충청도 연산현(連山縣) 동촌(東村) 왕대리(王臺里) 언덕에 있는데,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시 두마면 왕대리이다. 그의 무덤 앞에는 사당과 재실인 ‘숭원재(崇遠齋)’가 있다.

부인 원주 원씨(原州元氏)는 고려 정당문학원송도(元松燾)의 딸인데, 2남을 두었다. 장남 김문(金問)은 문과에 급제하고,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이 되었으나, 17세 때 일찍 죽었다. 차남은 김열(金閱)이다.

김문의 아내 양천 허씨(陽川許氏)는 남편 김문이 일찍 죽은 후 친정 부모가 개가(改嫁)시키려고 하자, 어린 아들 김철산(金鐵山)을 업고 개성의 친정집에서 충청도 연산의 시댁까지 걸어왔다. 이후 그는 수절하고 살면서 아들 김철산을 키워, 사헌부 감찰(監察)로 만들었다. 양천 허씨는 김철산의 아들 3형제도 손수 받아서 잘 키워 3형제가 나란히 과거에 급제하였는데, 맏손자 김국광(金國光)은 영의정을 지냈고, 둘째 손자 김겸광(金謙光)은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을 지냈다. 이렇듯 양천 허씨가 광산 김씨(光山金氏)의 주춧돌을 놓는 역할을 하였으므로, 1467년(세조 13) 나라에서는 그 정절을 기려 정려(旌閭)하였다.

한편 8대손이 예학자로 유명한 김장생(金長生)이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태조실록(太祖實錄)』
  • 『정종실록(定宗實錄)』
  • 『태종실록(太宗實錄)』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동문선(東文選)』
  • 『순암문집(順菴文集)』
  • 『양촌집(陽村集)』
  • 『해동잡록(海東雜錄)』
  •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