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녕(金壽寧)
총론
[1436년(세종 18)~1473년(성종 4) = 38세]. 조선 전기 세조(世祖)~성종(成宗) 때의 문신. 집현전(集賢殿) 수찬(修撰)과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 공조 참판(參判) 등을 역임했다. 자는 이수(頤臾)이고, 호는 양소당(養素堂)이며, 시호는 문도(文悼)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아버지는 절충장군(折衝將軍) 김숙(金潚)이며, 어머니 순흥 안씨(順興安氏)는 안숭선(安崇善)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참판(參判)김익정(金益精)이다. 세조 대에 『국조보감(國朝寶鑑)』 등의 찬수 작업에 참여했고, 한명회(韓明澮)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활약했으며, 성종 대에는 『세조실록(世祖實錄)』, 『예종실록(睿宗實錄)』 등의 편찬에 참여했다.
단종~세조 시대 활동
1453년(단종 1) 18세의 나이로 식년시 문과에 장원으로 합격해 집현전에 들어갔고, 다음 해부터는 집현전 수찬(修撰)을 역임했다. 당시 결혼하지 않은 관리는 춘추관(春秋館)에 임명하지 않던 관례가 있어 김수녕의 춘추관 직을 갈라는 명이 있었다. 그러나 그대로 유임되어 1455년(세조 1)에는 병조 판서(判書)이계전(李季甸), 우찬성(右贊成)정창손(鄭昌孫), 예문관(藝文館) 제학(提學)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관제(官制)를 편찬했다. 같은 해에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봉해졌다. 22세가 되던 1457년(세조 3)에는 우찬성신숙주(申叔舟), 춘추관 기주관(記注官)강희맹(姜希孟), 성임(成任), 김지경(金之慶) 등과 함께 『국조보감』을 찬술했다. 다음 해인 1458년(세조 4)에는 새롭게 찬술한 『국조보감』이 완성되어 자급이 한 단계 올랐고, 주문사(奏聞使)종사관(從事官) 직강(直講)으로서 전지 15결을 받았다. 또한 세조가 윤대(輪對)를 행할 때, 『주례(周禮)』를 인쇄해 널리 보급할 것, 기황(飢荒)이 심하니 백성들의 음주가무를 금할 것, 한양에서 음란한 풍습을 금할 것 등을 건의했다.(『단종실록』 1년 11월 2일),(『단종실록』 2년 7월 12일),(『세조실록』 1년 9월 2일),(『세조실록』 1년 12월 27일),(『세조실록』 3년 1월 8일),(『세조실록』 4년 1월 4일),(『세조실록』 4년 윤2월 11일),(『세조실록』 4년 4월 18일),[『국조보감(國朝寶鑑)』 수권(首券)]
26세인 1461년(세조 7)에는 이계손(李繼孫) 대신 체찰사(體察使)한명회의 종사관으로서 변방 업무를 수행했다. 같은 해 9월 김수녕은 한명회가 야인(野人)을 상대로 거둔 치적을 세조에게 보고했는데, 세조는 김수녕이 그 내용을 자세하게 잘 보고했다고 칭찬하며 세 자급을 올리라고 명했다. 그러나 이조에서는 김수녕이 적을 직접 물리친 공이 없으므로 한 자급만 더함이 적절하다고 건의했다. 이후에도 김수녕은 야인과 교통하거나, 한명회와 세조 사이에서 중요한 사안을 직접 전달하는 임무 등을 잘 수행하여 세조의 신임을 얻었다. 1462년(세조 8)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필선(弼善)에 제수되고 경연에 참가하기도 했으나, 1463년(세조 9) 한명회가 돌아 올 때까지 종사관으로서 변방과 한양을 오가며 변방 업무를 수행했다. 같은 해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에 제수되었다가 곧바로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임명되었다. 또한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최선복(崔善復)과 함께 『오월춘추(吳越春秋)』를 수교(讎校)하고, 최항(崔恒), 양성지(梁誠之), 송처관(宋處寬), 이파(李坡) 등과 함께 『동국통감(東國通鑑)』의 편찬을 시작했다. 이 해에 세조와 사냥을 나갔다가 군법을 어긴 죄로 고신이 삭탈되었으나, 한 달 뒤에 돌려받았다.(『세조실록』 7년 6월 5일),(『세조실록』 7년 9월 26일),(『세조실록』 7년 10월 30일),(『세조실록』 8년 2월 26일),(『세조실록』 8년 5월 17일),(『세조실록』 8년 5월 25일),(『세조실록』 9년 3월 3일),(『세조실록』 9년 4월 23일),(『세조실록』 9년 6월 3일),(『세조실록』 9년 윤7월 8일),(『세조실록』 9년 9월 5일),(『세조실록』 9년 9월 18일),(『세조실록』 9년 10월 26일)
28세가 되던 1464년(세조 10)에는 중추원(中樞院) 첨지사(僉知事)에 제수되었다가 곧 예조 참의(參議)에 임명되었다. 1465년(세조 11)에는 문과의 시관(試官)이 되었다가 승정원 좌승지(左承旨)에 제수되었다. 같은 해 봉석주(奉石柱) 등이 주도한 난을 처리할 때 김처례(金處禮)의 처벌을 주장했고, 평안도 극성(棘城)의 축성 논의 때 동선신역(洞仙新驛)의 북쪽 고개에도 성을 쌓아야 한다는 주장을 해서 세조의 칭찬을 듣기도 했다. 그 후 다시 중추원 첨지사에 제수되었으며, 이어 공조 참의에 임명되었다. 1468년(세조 14)에는 정자영(鄭自英), 구종직(丘從直) 등과 상정소(詳定所)에 나아가 『주역구결(周易口訣)』을 참정했다. 같은 해 성균관 대사성에 제배되었다가 다시 호조 참의에 제수(除授)되었다. 또한 최호원(崔灝元), 안효례(安孝禮) 등과 『시경(詩經)』 구결(口訣)을 논하기도 했다.(『세조실록』 10년 2월 4일),(『세조실록』 10년 9월 18일),(『세조실록』 11년 2월 9일),(『세조실록』 11년 4월 4일),(『세조실록』 11년 4월 19일),(『세조실록』 11년 4월 13일),(『세조실록』 11년 5월 10일),(『세조실록』 11년 10월 6일),(『세조실록』 14년 7월 29일),(『세조실록』 14년 8월 13일),(『세조실록』 14년 8월 17일)
예종~성종시대 활동
33세가 되던 1469년(예종 1)에 중추부(中樞府) 동지사(同知事)에 제수되었고, 이어 신숙주, 한명회, 최항, 양성지, 강희맹 등과 『세조실록』을 찬술했다. 이때 봉상시(奉常寺) 첨정(僉正)민수(閔粹)가 자신의 비리와 관련된 사초(史草)를 조작한 사실이 발각되었으므로, 김수녕은 한명회, 최항, 정난종(鄭蘭宗) 등과 함께 민수를 탄핵하고 사초를 바로 잡도록 청했다. 같은 해 김수녕이 형조 참의로 있을 때 뇌물을 받고 전(前) 문화현령(文化縣令)김경달(金景達)의 송사를 그릇되게 판결했다고 사헌부의 추핵을 받았으나, 김수녕은 결백을 주장했다.(『예종실록』 1년 2월 26일),(『예종실록』 1년 4월 24일),(『예종실록』 1년 8월 29일),(『예종실록』 1년 9월 14일)
이듬해인 1470년(성종 1)에 가선대부(嘉善大夫)가 되고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에 제수되었으며, 『예종실록(睿宗實錄)』의 편찬에 참여했다. 당시 귀성군(龜城君)이준(李浚)이 세조 때에 나인과 간통한 일, 귀성군이 국왕의 물망(物望)이 있다고 말한 권맹희(權孟禧), 권맹희의 말을 듣고도 이를 고하지 않은 한계미(韓繼美) 등에 대한 국문이 진행 중이었다. 성종은 귀성군을 경외에 안치하고, 한계미는 용서해주었는데, 김수녕은 귀성군을 중벌에 처하고 한계미는 국문을 한 후 관직을 삭탈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같은 해 김수녕은 신숙주, 한명회 등 정승을 지냈거나 의정부, 육조, 춘추관의 2품 이상의 신료들과 모여 장순빈(章順嬪)의 시호(諡號), 능호(陵號), 의경세자(懿敬世子)의 시호, 묘호(廟號), 능호, 수빈(粹嬪)의 휘호(徽號) 등을 의논했다. 또한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경연의 확대, 서경권의 회복, 평안도 지역의 공세(貢稅) 절감, 왜인(倭人)과 야인의 시위(侍衛) 금지, 간경도감(刊經都監)의 폐지, 진휼 시행, 작상의 엄격한 시행, 형벌의 엄밀한 적용 등을 주장했다.(『성종실록』 1년 1월 15일),(『성종실록』 1년 1월 18일),(『성종실록』 1년 1월 19일),(『성종실록』 1년 1월 22일),(『성종실록』 1년 2월 14일),(『성종실록』 1년 4월 14일),(『성종실록』 1년 6월 2일)
사간원 대사간으로서는 사헌부 대사헌(大司憲)한치형(韓致亨)과 함께 많은 일을 처리했다. 성임이 뇌물을 받고 수령직을 제수한 사실, 김정광(金廷光)이 수령으로 있을 때 지나치게 많은 세금을 거둔 일 등을 고발해 죄인을 중죄에 처해야 한다며, 부패 관리의 처벌에 강경했다. 또한 『대학(大學)』의 구절을 임의대로 풀이한 구종직(丘從直), 재능이 없는데 동반직(東班職)에 제수된 강대생(姜帶生), 직권을 남용한 공신인 김국광(金國光) 등을 처벌해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예종(睿宗)의 3년 상을 준수할 것, 불경 간행 사업을 금지할 것, 과거 시험에서 제술의 비중을 줄여 경전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도록 유도할 것 등을 상언하기도 했다.(『성종실록』 1년 5월 22일),(『성종실록』 1년 7월 11일),(『성종실록』 1년 8월 16일),(『성종실록』 1년 12월 1일),(『성종실록』 1년 12월 12일),(『성종실록』 2년 1월 21일),(『성종실록』 2년 3월 19일),(『성종실록』 2년 8월 3일)
1471년(성종 2)에는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었으나 스스로 고사했다. 그럼에도 성종은 김수녕을 공신으로 정하여 복창군(福昌君)에 봉했다. 같은 해 가정대부(嘉靖大夫) 공조 참판에 제수되었고, 『세조실록』과 『예종실록』의 편찬을 마무리 지었다. 1472년(성종 3)에 호조 참판에 제수되었다가, 1473년(성종 4)에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성종실록』 2년 6월 30일),(『성종실록』 2년 9월 6일),(『성종실록』 2년 12월 18일),(『성종실록』 3년 5월 10일),(『성종실록』 3년 6월 17일),(『성종실록』 4년 4월 5일),(『성종실록』 4년 7월 3일)
성품 및 일화
김수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문장에 밝아 신동으로 불렸다. 김수녕은 승정원에 있을 때 분판에 필기를 해두는 습관이 있었다. 이를 보고 이계손이 “일에 이르러서는 마땅히 스스로 암기해야지 어찌 이 판을 쓰는가?”라고 했다. 하지만 하루는 세조가 자신은 분판에 항상 필기하는데 승정원에서도 이를 구비하고 있는지 묻자 이계손이 민망해 했다.(『세조실록』 9년 7월 30일),(『성종실록』 4년 7월 3일) 또한 김수녕은 문과의 시관으로 있을 때 유양춘(柳陽春)의 문장이 뛰어난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는데, 유양춘이 제출한 글이 졸렬해 이를 이상하게 여겨 이 사실을 유양춘에게 말해주었다. 이에 유양춘은 전주판관(全州判官)현득리(玄得利)가 자신의 시권(試券)을 바꿔치기 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현득리는 자신의 재주가 유양춘에 미치지 못해 이를 분하게 여기고 시권을 바꿔치기 한 것이었다.(『세조실록』 11년 3월 17일)
김수녕은 두 번이나 승정원 승지에 제수되었다가 파직 당했는데, 강희맹이 이를 희롱했다. 그러나 김수녕은 오히려 한 번도 승정원 승지를 못한 것보다 낫지 않느냐고 답하며 승정원 승지를 한 번도 하지 못한 강희맹을 희롱했다. 또 김수녕은 초시, 중시에 모두 장원으로 급제하려 했으나, 초시에만 장원으로 급제하고 중시에서는 장원으로 급제하지 못했다. 이를 두고 서거정(徐居正)이 김수녕을 희롱했는데, 오히려 “갑과(甲科)의 일등이 되지 못하였으니, 어찌 을과(乙科)의 일등을 취하겠는가?”라고 말하며 을과에서 일등한 서거정을 거꾸로 희롱했다고 한다.[『필원잡기(筆苑雜記)』 권2]
성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했을 때 김수녕은 대사간의 직임을 맡고 있었다. 이 때 김수녕은 상소를 올려 임금이 아직 어리니 조강(朝講), 주강(晝講)뿐만 아니라 석강(夕講)도 게을리하지 말고, 임금의 질문에 상시 대답할 수 있게 경연관을 번갈아 숙직시켜야한다고 말하기도 했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6 성종조 고사본말]
참고문헌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예종실록(睿宗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국조보감(國朝寶鑑)』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필원잡기(筆苑雜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