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산군(金山郡)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신라시대에서 기원하여 1914년까지 현재 경상북도 김천시 교동·삼락동 지역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던 조선시대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김산군(金山郡)은 신라시대의 김산현(金山縣)에서 기원하였다. 신라의 김산현은 개령군(開寧郡)의 영현(領縣)이었다. 고려시대에도 그대로 김산현이라 불렀고, 경산부(京山府)의 속현(屬縣)이 되었다. 1390년(고려 공양왕 2)에 처음으로 감무(監務)가 파견되었다. 조선 건국 후인 1399년(정종 1)에 김산군으로 승격되어 그대로 존속하였다. 하지만 경부선 철도의 개통과 함께 철도 노선이 조선시대 찰방역(察訪驛)이었던 김천역(金泉驛) 근방을 지나가게 되면서 김산군의 중심지적 기능은 김천역 지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1914년에 김산·개령·지례 3군이 통합되어 김천군이 되었다. 김산군은 현재의 경상북도 김천시 지역에 위치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김산군은 신라시대에 김산현이라 불렸다. 신라 9주(九州) 중 상주(尙州)에 속했던 개령군의 영현으로 편성되었다. 고려시대에도 그대로 김산현이라 하였으며, 1018년(고려 현종 9)에 경산부(현: 경상북도 성주군 성주읍 일대)의 속현이 되었다. 1390년부터 감무를 파견하였다. 조선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김산현이라 부르다가, 1399년(정종 1)에 임금의 태를 안치한 곳이라는 이유로 김산군으로 승격하였다(『정종실록』 1년 4월 5일).

조직 및 역할

신라시대에 김산현은 개령군의 영현으로 소수(少守) 혹은 현령(縣令)이 파견되었다. 고려시대에 김산현은 경산부에 소속된 속현이었다. 속현인 김산현에는 중앙에서 별도의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으며, 경산부에 파견된 지방관이 관할하였다. 대신 김산현에는 별도로 읍사(邑司)가 설치되어 토착의 향리(鄕吏)들이 읍사에서 자치적으로 지방 행정업무를 수행하였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서 향리의 권한과 지위는 약화되고, 김산군의 군수(郡守)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김산군에는 종4품의 군수와 종9품의 훈도(訓導)가 파견되었다. 18세기의 지리서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김산에는 4품의 문관(文官)이나 음관(蔭官)이 군수로 임명되며,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2명, 관군관(官軍官) 53명, 인리(人吏) 32명, 지인(知印) 24명, 사령(使令) 20명, 관노(官奴) 27명, 관비(官婢) 29명이 편성되었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도 종4품의 군수가 임명된다는 내용이 있다.

변천

1399년(정종 1)에 김산군으로 승격한 이후 조선시대 내내 김산군의 연혁은 거의 변동이 없다. 1895년(고종 32)에 전국을 23부로 나누었을 때 김산군으로 대구부의 관할에 속했다. 1896년(고종 33)에 13도제가 실시되면서 김산군은 경상북도 관할의 3등군으로 편제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김산·개령·지례의 3군을 통합하여 김천군이 되었다. 김천이라는 지명은 조선시대의 역도인 김천도의 찰방역이었던 김천역에서 유래하였다. 경부선 철도가 김천역 일대를 지나면서 기존의 김산군 읍치 대신 김천역이 지역 중심지가 된 것이다. 조선시대에 김산군의 관아가 위치했던 곳은 현재 경상북도 김천시 교동·삼락동 일대이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 『대동지지(大東地志)』
  •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