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령(金德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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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67년(선조 즉위년)∼1596년(선조 29) = 30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 때의 의병장. 형조 좌랑(佐郞)을 지냈다. 자는 경수(景樹)이고, 시호는 충장(忠壯)이며, 별칭(別稱)은 석저장군(石底將軍), 혹은 익호장군(翼虎將軍)·충용장군(忠勇將軍)이다.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거주지는 전라도 광주(光州) 석저촌(石底村)이다. 아버지는 김붕섭(金鵬燮)이고, 어머니 남평 반씨(南平潘氏)는 직장(直長)반계종(潘季宗)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선무랑(宣務郞)김윤효(金允孝)이며, 증조할아버지는 호조 정랑(正郞)김익(金翊)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도원수(都元帥)권율(權慄)의 휘하에서 경상도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와 협력하여 왜군이 전라도로 침범하는 것을 막았다. 1596년(선조 29) 충청도 <이몽학(李夢鶴)의 반란>에 연루되었다는 무고를 당하여 옥사(獄死)하였다. 그의 억울한 생애는 민간 설화로 전해져서, 고려의 최영(崔瑩) 장군처럼 민중의 영웅이 되었다.

선조 시대 활동

1568년(명종 13) 12월 29일 광주 석저촌(石底村 : 지금 충효동)에서 아버지 김붕변과 어머니 남평 반씨 사이에 3남 3녀 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태종(太宗) 때 의정부 찬성(贊成)을 지낸 김한로(金漢老 : 양녕대군 장인)의 후손인데, 고조할아버지 김문손(金文孫)이 광주 서구 금호동에서 북구 충효동으로 집터를 옮겼다. 증조할아버지 김익은 호조 정랑을 지냈으나, 할아버지 김윤효와 아버지 김붕섭은 재행(才行)이 있었음에도 벼슬이 현달하지 못하였다. 집안이 대대로 유학을 숭상하여 어려서부터 종조부 김윤제(金允悌)로부터 글을 배웠는데, 문장에 뛰어나다는 평판을 얻고 17세가 되던 해에 향시에 합격하였다. 또 무술에도 뛰어나서 1백 근의 철퇴를 차고 나는 듯이 말을 달리면서 큰 칼을 좌우로 휘둘러 숲을 자르다가, 대나무 숲 속에 숨어있는 사나운 호랑이를 활로 쏘고 창으로 잡았다. 18세 때 담양에 살던 흥양 이씨(興陽李氏)와 혼인하였다.[『김덕령 장군전』]

1587년(선조 20) 20세 때 친형 김덕홍(金德弘)과 자형 김응회(金應會)와 함께 파주(坡州)로 가서 서인(西人)의 영수 성혼(成渾)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서인과 동인(東人)의 정권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는데, 이런 가운데 1589(선조 22) <정여립(鄭汝立) 모반 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서인의 좌의정정철(鄭澈)이 위관(委官 : 재판장)으로서 동인의 과격파 이발(李潑) 등 1천여 명을 숙청하며 동인의 원망을 크게 샀다. 이것을 <기축옥사(己丑獄死)>라고 한다. 김덕령은 성혼의 제자로서 서인 계열에 속하였을 뿐만 아니라 좌의정정철과는 동향(同鄕)이었으므로 이후 동인 출신 대간(臺諫)들로부터 의병장 김덕령이 군율을 너무 엄격하게 적용하여 군사를 죽였다고 탄핵받기도 하였다.

1592년(선조 25) 4월 14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해 6월 친형 김덕홍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서 전라도 의병장(義兵將) 고경명(高敬命) 막하에 들어가서 활동하였다. 김덕령 형제가 의병을 거느리고 전주(全州)에 이르렀을 때 형 김덕홍이 동생 김덕령에게 병중에 있던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고향 광주로 돌아갈 것을 권유하자, 하는 수 없이 김덕령은 홀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 달인 7월 형 김덕홍은 고경명을 도와 금산(錦山)에서 호남 지방을 침범하려는 고바야카와 다카가게[小早隆景]의 왜군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김덕령은 고향 광주에서 어머니의 병환을 구료하면서 무등산에서 무예를 닦고, 주검동(鑄劒洞)에서 무기를 만들어 의병을 지원하였으나, 끝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

그런 가운데 1593년(선조 26) 6월, <제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이 왜군에게 대패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호남 지방에서 유능한 장수를 뽑아 경상도로 보내기로 결정하고, 전라도 지방 수령들에게 문무를 겸전한 인물을 추천하게 하였다. 일본의 관백(關伯)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제 1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 목사김시민(金時敏)에게 패배한 것을 설욕하려고, 10만여 명의 대병을 집결시켜 진주성을 공격하여 수만 명의 진주 사람을 모조리 도륙하였기 때문이다.

담양부사(潭陽府使)이경린(李景麟)과 장성현감(長城縣監)이귀(李貴)가 김덕령을 추천하자, 그해 12월 13일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이정암(李廷馣)이 전주의 분조(分朝)에 김덕령을 천거하기를, “지금 담양부사이경린의 첩보(牒報)를 보건대, 향교생 김덕령이 젊어서부터 용기가 뛰어나 온 고을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였는데, 이제 장수를 선발하는 때에 이 사람보다 나은 사람이 없지만, 지금 상중에 있어서 응모하기가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담양에 가서 김덕령을 불러 보고 기복(起復)하여 종군시켜서 위급한 국가를 구원하도록 권유하였습니다. 이제 김덕령이 바야흐로 의병을 모집하고 있는데, 원근의 사람들이 다투어 그를 붙좇는다고 합니다. 김덕령도 다짐하기를, ‘동지 수백 명을 모집하게 되면, 왜적의 예봉을 꺾고 적진을 함몰시키기 위해 일대 사전(死戰)을 벌일 결심이라’고 합니다. 그 뜻이 매우 가상하니, 특별히 조정에서 격려하고 표창하소서. 그리고 군량과 병기 등의 물품도 사적으로 준비하기는 어려울 것이니, 각 고을에 저축되어 있는 것 가운데서 숫자를 헤아려 지급하게 하소서.” 하니, 당시 세자로서 분조를 이끌던 광해군(光海君)이 흔쾌히 허락하였다.(『선조실록』 26년 12월 13일)

그해 12월 27일 세자 광해군은 김덕령을 분조로 불러, 전주의 무과시험장에서 수많은 수험생들이 보는 가운데 무예를 시험하였다. 김덕령은 백마를 타고 긴 칼과 철퇴를 휘둘렀으며, 이것이 얼마나 신출귀몰한지 여러 사람들로부터 찬사와 박수를 받았다. 세자 광해군은 곧바로 김덕령을 의병장에 임명하였고, 진주로 가서 여러 지방의 의병을 통솔하여 왜적과 싸우도록 명하였다. 그때 세자 광해군은 김덕령을 선전관(宣傳官)에 임명하고 ‘익호장군’의 칭호를 내려주었고, 선조도 김덕령을 형조 좌랑에 임명한 후 의병의 호칭을 충용군(忠勇軍)이라고 내려주었으므로, 속칭 김덕령을 ‘충용장군’이라고도 불렀다. 이어 1594년(선조 27) 1월 22일 김덕령은 1천 명의 전라도 의병을 거느리고 군량미 3천 석을 실은 후 담양을 출발하여 남원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남원 사람 최담령(崔聃齡)을 별장(別將)으로 삼고, 의병을 한 달 이상 훈련시킨 다음에, 함양·산청을 거쳐 그해 4월 초에 경상도 진주 대곡면 대곡리(大谷里)에 도착하여 진을 쳤다.

이때 분조에 있던 세자 광해군이 작전상의 통솔과 군량미 조달 문제로 각 처의 의병을 통합하여, 김덕령의 충용군에 소속시키도록 명하였다. 나이 28세의 김덕령은 조선 의병 5천여 명을 거느리는 의병 총대장에 임명되어, 조방장(助防將)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도원수(都元帥)권율(權慄)의 막하에서 경상도 서부 지방 방어 임무를 맡았다. 1594년(선조 27) 여름 진지를 대곡리(大谷里)에서 대여촌(代如村 : 지금 금산면 가방리)으로 옮기고, 둔전(屯田)을 실시하여 의병들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며, 진주성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월아산(月牙山) 정상에 목책(木柵)을 설치하여 왜군의 침입에 대비하고, 정상 부근에 제무소를 두어 무기를 직접 만들었다. 김덕령이 의병을 일으켰을 무렵 마침 명(明)나라와 일본 사이에 강화 교섭이 진행되면서 전쟁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으므로 큰 전투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고성(固城)·창원(昌原)·정암진(鼎巖津) 전투에서 전과를 올려, 왜적이 진주 일대에 다시 출현할 수 없도록 만들면서 마침내 전라도를 온전히 보전할 수 있게 하였다.

이어 그해 9월과 10월 김덕령은 곽재우(郭再祐)·이순신(李舜臣)·원균(元均)과 함께 수륙 연합 전선을 형성하여, 장문포(長門浦)의 왜적을 공격하였으나, 왜장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가 성을 철통같이 수비하고 성 밖으로 나오지 않았으므로 별다른 전과를 거두지 못하였다.[『고대일록』 권2] 1595년(선조 28) 3월 김덕령은 곽재우의 의병과 연합하여 정암진(鼎巖津) 전투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렀다. 그러나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강화 조약이 성립되어, 전투 상황도 거의 없어지고 또 군량미도 부족해지자, 조정에서는 의병을 줄이도록 명하였다. 이에 김덕령은 의병 5천여 명 가운데 호남 출신 측근 의병 5백여 명만 남기고 나머지 의병은 모두 귀농시켰다. 강화 조약이 성립됨에 따라서 왜적과 싸움할 기회가 점차 줄어들고, 의병 숫자도 더욱 줄어들게 되자, 김덕령은 울화가 쌓여서 과음을 하였다. 더욱이 해이해진 군사 기강을 바로잡으려고 군율을 엄하게 시행하여 도망치는 부하 몇 사람을 붙잡아 처형하자, 막료와 군사들 사이에서는 불평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해 12월 김덕령은 도체찰사(都體察使)윤두수(尹斗壽)의 노복(奴僕)을 장살(杖殺)한 죄로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좌의정윤두수는 서인의 영수였으므로 김덕령은 서인으로부터 외면당하였으나, 우의정정탁(鄭琢) 등의 적극적인 변호와 영남 유생들의 상소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다. 이듬해인 1596년(선조 29) 2월 석방된 김덕령은 다시 진주의 의병 대장으로 돌아갔으며, 이것이 <제 1차 김덕령 옥사>이다.

그해 7월 충청도 홍산(鴻山)에서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키자, 도원수권율의 명령을 받은 김덕령은 의병을 이끌고 진주에서 운봉(雲峯)까지 진군하였는데, <이몽학의 반란>이 이미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김덕령은 고향 광주로 돌아가기를 원하였으나, 도원수의 허락을 받지 못해 다시 진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때 충청도체찰사(忠淸道體察使)의 종사관신경행(辛景行)과 모속관(募粟官 : 군량미를 수집하는 관리)한현(韓絢)이 “김덕령 등이 이몽학과 내통하였다”고 무고하는 바람에 김덕령과 최담년(崔聃年)·곽재우·고언백(高彦伯)·홍계남(洪季男) 등이 모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재상이었던 정탁·김응남(金應南) 등이 그의 무고함을 힘써 변명하였으나, 선조가 직접 친국(親鞫)하는 등 20일 동안 김덕령은 여섯 차례의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그러나 끝까지 자복(自服)하지 않다가 ​“충효로써 죽음을 삼은 죄밖에 없습니다”라는 말을 남긴 채 그는 그해 8월 21일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당시 김덕령의 나이는 겨우 30세였다. 그 뒤에 곽재우·최담년 등은 모두 석방되었다. 이것이 <제 2차 김덕령 옥사>이다.

김덕령의 업적에 대한 평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丁酉再亂)>은 7년 동안 계속되었으므로 일명 ‘7년 전쟁’이라고 부르는데, 7년 동안 전쟁이 줄곧 계속된 것이 아니었다. 1592년(선조 25) 4월부터 8월까지 왜군이 조선의 관군을 격파하고 파죽지세로 북상하자, 선조는 의주(義州)로 피난하였고, 20여 일 만인 5월 5일 서울이 함락되었다. 그해 6월부터 각 지방에서 의병이 일어났는데, 경상도 의병장 곽재우, 전라도 의병장 고경명, 충청도 의병장 조헌 등이 각기 왜적을 격파하였다가, 금산 전투에서 의병장 고경명과 조헌이 모두 전사하였다. 그러나 1592년(선조 25) 8월부터 명나라의 심유경(沈惟敬)과 일본의 고니시 유키니카[小西行長] 사이에 강화 회담이 시작되어, 1593년(선조 26) 6월 강화 조약이 성립되었다. 왜군에게 사로잡혔던 임해군(臨海君)·순화군(順和君) 두 왕자가 송환된 후 그 뒤 4년 이상 전쟁이 소강상태에 들어가며 그다지 큰 전투가 없었다. 그러다가 1596년(선조 28) 9월 강화 조약이 깨지고, 1597년(선조 30) 1월 정유재란이 발생하며 전쟁이 다시 치열하게 전개되었으나, 1598년(선조 31) 8월 일본의 관백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그의 유언에 따라서 왜군이 철수하며 7년 전쟁도 끝이 났다.

의병 대장 김덕령이 활동한 시기는 전라도 의병을 거느리고 담양을 출발한 1594년(선조 27) 1월 22일부터 옥중에서 사망한 1596년 8월 21일까지의 2년 7개월간이다. 이 시기는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강화 조약이 성립되면서 전쟁이 소강상태에 있을 때였다. 그가 옥중에서 사망한 뒤 한 달 만에 정유재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광해군을 급히 세자로 임명하고 왜적이 침범하지 않는 전라도 전주에서 분조를 이끌고 3남 지방의 관군과 의병을 지휘하며 왜군의 후방을 공격하게 하였다. 1593년(선조 26) 세자 광해군은 각 지방에서 의병이 수 없이 일어나자, 의병을 하나로 통합하여 관군과 연합 작전을 수행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전라도 지방의 수령들에게 문무를 겸전한 인물을 추천하게 한 결과 김덕령을 추천받고, 전주의 분조로 불러 무예를 시험한 다음 전국의 의병을 거느리는 의병 대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전라도에서 의병을 모집한 후 경상도 진주로 가서 왜적을 방어하도록 명하였다.

김덕령이 처가가 있던 담양에서 의병 1천여 명을 모집하여 전라도 의병을 거느리고 진주로 간 까닭은 진주성 전투와 관련이 있었다. 1592년(선조 25) 10월 제 1차 진주성 전투에서 진주목사김시민은 경상도 의병장 곽재우와 함께 불과 3천 8백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하시바 토오겐로[羽柴藤元郞]가 지휘하는 왜군 4~5만여 명을 섬멸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 6월 양국의 화의가 성립되자 가토오 키요마사[加藤淸正]와 고니시 유키나카는 제 1차 진주성 싸움의 패배를 복수하고자 후퇴하는 왜군을 진주성으로 총집결시켜, 제 2차 진주성 싸움을 벌여 진주성 안에 있던 군관민(軍官民) 5만여 명을 옥쇄(玉碎)하였다. 이에 전라도의 의병을 경상도 진주로 보내어 경상도 관군과 의병의 사기를 진작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비변사에서는 의병 대장 김덕령에게 전라도 의병을 거느리고 진주로 가서 주둔하게 하였던 것이다.

나이 28세의 김덕령은 전국 의병 5천여 명을 거느리는 의병 총대장에 임명되어, 조방장 곽재우와 함께 도원수권율의 막하에서 경상도 서부 지방의 방어 책임을 맡았다. 그때 마침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가 성립되면서 전쟁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어 큰 전투가 없었으나, 장문포(長門浦)과 정암진(鼎巖津) 전투에서 승리하여 왜적이 진주 일대에 다시 출현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이후 강화 조약이 성립되면서 전투 상황도 거의 종결되었고, 군량미가 부족해지자 비변사에서는 김덕령에게 의병 숫자를 줄이도록 명하였다. 또 후퇴하는 왜군과 되도록 충돌을 피하기 위하여 무익한 전쟁을 벌이지 말라고 명하였다. 이에 김덕령은 의병 5천여 명 가운데 호남 출신 측근 의병 5백여 명만 남기고 나머지 의병은 모두 고향으로 돌려보냈다.[비문]

김덕령 옥사와 선조

전쟁이 소강 상태에 빠지자, 진주에 주둔하던 전라도 의병도 점차 군기가 해이해졌다. 의병들 가운데에는 틈만 보이면 탈주하여 고향 전라도로 돌아가는 사람도 있었으므로, 김덕령 주변의 의병 숫자도 점차 줄어들었다. 이에 김덕령은 울화가 치밀어 과음을 하였고. 또 탈주하는 군사를 막기 위하여 군율을 엄하게 세우고자 몇 사람의 탈영범을 잡아 처형하자, 막료와 병사들 사이의 불평이 점차 심해졌다. 비변사에 이것이 보고되자 서인과 동인을 막론하고 의병 대장 김덕령에 대한 비난을 쏟아 냈다. 그런 가운데 1595년(선조 28) 12월 김덕령은 3도(道) 도체찰사(都體察使)윤두수의 노복을 장살한 죄로 투옥되었는데, 이때 서인은 그를 비난하였으나 동인의 재상들이 그를 옹호하였다. 이에 선조는 김덕령을 석방하였고, 이것이 제 1차 김덕령 옥사이다.

이어 1596년(선조 29) 7월 충청도 홍산에서 이몽학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김덕령은 이 사건에 연루되어 최담년·곽재우 등과 함께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김덕령을 매우 의심한 선조는 직접 친국을 하는 등 20일 동안에 6차례나 심문하며 매번 30대의 장형(杖刑)을 때리고 자복을 강요하였다. 동인의 재상 정탁·김응남 등이 그의 무고함을 힘써 변명하였고, 동인의 영수 영의정유성룡(柳成龍)도 심문을 늦추도록 건의하였다. 그러나 서인의 영수 좌의정윤두수는 심문을 빨리 끝내도록 건의하였다. 옥사의 국문이 너무 긴박하게 진행되어 심문을 받던 김덕령이 죽을까봐 염려하여 심문을 늦추도록 건의한 유성룡과 달리 윤두수는 오히려 심문을 빨리 끝내자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김덕령이 일찍이 체찰사윤두수의 노복을 장살하였기 때문이었고, 이것이 제 2차 김덕령 옥사이다.

김덕령을 체포하여 친히 심문하던 선조는 지나칠 정도로 김덕령의 지략에 대하여 관심을 보였는데, 선조가 알고 싶어 한 ‘지략’은 김덕령의 학식과 무예가 아닌 김덕령이 지녔다는 신통력을 말하는 것이었다. 1593년(선조 26) 12월 4일 선조는 영의정유성룡에게 “김덕령은 용맹이 어떠한가. 특별히 지략으로 이름난 것은 없는가.”라고 물었고, 영의정유성룡은 “지략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습니다. 연소한 사람인데, 나이가 28세라고 합니다.”라고 대답한 적이 있었다. 동인의 영수였던 유성룡은 김덕룡에 대하여 칭찬도 폄하도 하지 않고 신중하게 중립을 지켰던 것이다.(『선조실록』 26년 12월 4일)

또 1595년(선조 28) 1월 8일 선조가 경연에서 이항복(李恒福)에게 묻기를, “경은 김덕령을 보았는가. 위인이 어떻던가.” 하니, 이항복이 아뢰기를, “그의 외모를 보면, 단지 하나의 연소한 선비에 지나지 않았으나, 용력(勇力)이 남보다 뛰어나므로 무인들이 복종하고 있었습니다.”라고 대답한 적이 있었다. 당시 선조가 묻기를, “지략이 있던가.” 하니, 이항복은 “지략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용렬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선조가 “글을 잘하는가.”라고 물었을 때도 이항복은 “글을 약간 합니다.” 하였다. 그때 정광적(鄭光績)이 아뢰기를, “군사를 일으키던 초기에는 모두 그가 큰 공을 세우리라고 여겼는데, 별로 성과가 없었습니다. 대개 조정에서 그에게 기대한 바가 너무 컸기 때문에 그의 군졸들이 대다수 이탈하였으므로, 지금은 단지 얼마 안 되는 군사만을 거느리고 있다고 합니다.” 하였다.

이때 이항복이 변명하기를, “신이 남쪽 지방에 있을 때 그의 참모들을 보니, 대다수가 과격한 사람들이었고, 그도 술을 마시고 실수하는 일이 많아서 군졸들이 이탈하게 된 것입니다. 그 뒤에 그는 글을 지어 사졸들과 맹약(盟約)을 하였으므로 지금은 군사가 약간 회복되었다고 합니다.” 하자, 선조가 말하기를, “대개 우리나라 사람들은 말하는 것이 신중하지 않고 함부로 말하기 때문에 나는 그가 성공하지 못할 줄을 알았다. 김덕령이 말하기를, ‘총통(銃筒) 3백 자루를 쏘았더니, 왜적이 저절로 무너졌다.’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쌍무지개가 내 몸을 둘러쌌다’고 하였는데, 어찌 그럴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선조실록』 28년 1월 8일)

1596년(선조 29) 2월 19일 김덕령의 옥사가 일어났을 때 선조는 김덕령을 지휘하고 감독하였던 도원수권율을 불러서 묻기를, “김덕령은 어떠한 사람인가.”하니, 권율이 아뢰기를, “김덕령은 본래 광주의 향교생인데, 용력이 뛰어나 쓸 만한 인재입니다. 그러나 항상 자기 군대에서 군율이 엄하지 못한 것을 분개하여, 휘하 사람 중에 범죄자가 있으면 귀를 자르거나 혹은 곤장을 때리기도 하였으므로, 휘하 사람들이 점차 도망한다고 합니다.” 하고, 그때 우의정김응남은 아뢰기를, “김덕령은 힘이 남보다 뛰어난 사람입니다. 지금 만약 특명으로 석방하여 돌려보내면, 그는 반드시 감격하여 나라에 은혜를 보답할 것입니다.” 하였다.

선조가 북인의 영수 정인홍(鄭仁弘)에게 보낸 편지에서, “경은 이귀의 사람됨을 알고 있는가. 그는 일찍이 김덕령의 양쪽 겨드랑에 두 마리의 범이 들락날락한다는 말을 지어낸 자이다. 이런 말을 지어낼 수 있는데, 무슨 말을 지어내지 못하겠는가.” 하였다.[『혼정편록』 권7]선조는 김덕령을 추천한 장성현감이귀를 아주 불신하였는데, 김덕령의 무용담을 단순히 황당무계하다고 생각하여서가 아니라, ‘쌍무지개가 몸을 둘러쌌다.’와 ‘양쪽 겨드랑에 두 마리의 범이 들락날락한다’는 말이 김덕령의 신통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장차 왕권에 도전할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몽학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김덕령이 반란에 연루되었다는 공초(供招)가 나오자마자 김덕령을 사저(私邸)에 특별히 감금하고, 직접 친국하고 형문하며 김덕령을 죽게 만들었던 것이다.

정조(正祖)는 김덕령의 죽음을 애통하게 여겨서 「김충장공유사(金忠壯公遺事)」를 편찬하게 하고, 서문에서 “아, 충장공(忠壯公) 같은 이는 어찌하여 그렇게도 불행했는가. 그가 태어난 시기는 국운이 전성기를 맞은 선조 때였다. 이러한 시대에 뛰어난 용력과 세상을 다스릴 만한 재목으로 칼을 짚고 초승군(超乘軍)을 통솔할 때에, 익호장군이니 충용장군이니 하면서 조정에서 얼마나 그를 중시하였으며, 적군에서는 또 참 장군[眞將軍]이니 석저장군이니 하며 얼마나 두려워하였는가. 그가 남긴 말은 문자의 사이에 있어서 백세(百世)가 지난 오늘날에도 그의 말과 문자를 읊조리노라면, 어렴풋이 그 모습이 그림처럼 나타나고 목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내가 보기에 이 세상에서 자기의 말과 업적이 후세에 전해지기를 바라는 이들은 수 없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역사에 남아 있고 기록에 강렬한 빛으로 남아 있는 자는 몇 사람이나 되겠는가. 그것을 보면 참다운 기운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고, 이 책도 반드시 후세에 전해지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다.[『홍재전서』 권183 「김충장공유사(金忠壯公遺事)」]

성품과 일화

김덕령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일찍부터 자부심이 강하고 비분강개하는 기질을 가졌으며, 풍모는 그다지 장대(長大)하지는 않았으나, 용맹이 아주 뛰어나고 날렵하였다. 속으로 큰 뜻을 품고 있었으나, 겉으로 드러내지 않아서 사람들 가운데 이를 아는 자가 드물었다. 김덕령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조자룡(趙子龍)에 견주었는데, 일찍이 시를 짓기를, “군병을 거느리고 적을 무찌르고, 갑옷을 벗고 강호(江湖)로 돌아가겠다”고 하여, 자기 뜻을 읊었으나, 그 의중을 아는 자가 드물었다.[『서하집』 권5]

집안이 대대로 유학을 숭상하여, 김덕령도 어렸을 때 향교에 다녔고, 문장에 뛰어나서 향시에도 뽑혔다. 20세 때 친형 김덕홍과 자형 김응회와 함께 파주로 가서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유학의 정도(正道)를 터득하고 충효를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김덕령은 무사(武士)의 재주를 타고났다. 어려서 무술을 연마할 때 두어 길 되는 칼을 즐겨 사용하였는데, 말에 올라타고 산비탈을 지나가면서 칼을 좌우로 휘둘러서 숲을 자르고 달리면, 지나가는 곳마다 큰 소나무가 어지럽게 쓰러져서, 마치 폭풍우가 지나간 듯하였다. 또 항상 한 쌍의 철퇴(鐵槌)를 차고 다니면서 좌우로 휘둘렀는데, 그 무게가 각각 1백 근이나 되었다고 한다. 때로는 말을 달려 집의 방문 안으로 들어갔다가 곧바로 몸을 날려 말을 거꾸로 타고 나오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집의 지붕에 올라가서 몸을 옆으로 숙여 처마에서 굴러 떨어졌는데, 몸이 땅에 닿기 전에 몸의 자세를 바꾸어 얼른 방안으로 껑충 뛰어 들어가기도 하였다. 한 번은 사나운 호랑이 한 마리가 대밭 속에 숨어 있으며 나오지 않자 김덕령이 먼저 활을 쏘아 호랑이의 화를 돋우자, 호랑이가 놀라고 화가 나서 입을 딱 벌리고 사람을 삼킬 듯이 돌진하였다. 김덕령이 재빨리 창을 빼어들고 호랑이를 맞받아 찌르니, 호랑이가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다.[『김덕령 장군전』]

처음에 김덕령이 기병(起兵)할 때 서석산(瑞石山) 골짜기에서 큰칼을 만들었는데, 칼이 만들어지자, 산에서 우뢰와 같은 소리가 울리고 흰 기운이 산골짜기에서 하늘까지 뻗치어 며칠간을 사라지지 않았다. 그 고을에는 옛날 고려 명장 정지(鄭地)의 무덤이 있었는데, 자손이 대대로 정지의 철갑옷[鐵衣]을 간수하고 있었다. 정지 장군을 항상 흠모하던 김덕령이 정지 장군이 남긴 철갑옷을 입고서 새로 만든 칼을 차고, 정지의 묘소에 가서 제사를 올렸다. 그때 차고 있던 칼이 저절로 풀려서 땅에 떨어지기를 세 차례나 하니,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기고 상서롭지 못하다고 생각하였다.[『김덕령 장군전』]

김덕령이 진주에 주둔하고 있을 때 목장 안에 사나운 말이 있어서 한 번 뛰면 나는 듯이 달렸으므로 사람들이 얼씬도 못하였다. 김덕령이 그 소문을 듣고 찾아가서 그 말에게 굴레를 씌우고 올라타니, 말이 길들여진 듯이 온순하였다. 김덕령은 그 백마를 타고 싸움터에서 왜적과 번번이 싸워서 이겼으므로, 왜적은 김덕령을 ‘백마장군’이라고 불렀다. 김덕령이 처음 체포되었을 때에 말이 며칠 전부터 먹지를 않았는데, 두 번째 다시 체포될 때에도 또 열흘이나 먹지 않았다. 이에 봉명사자(奉命使者)가 오지 않았음에도, 김덕령은 화가 자기에게 닥칠 것을 미리 짐작하였다.[『김덕령 장군전』]

송시열(宋時烈)이 말하기를 “김덕령은 광주 사람으로 이정구(李廷龜)의 집안에 의해서 발신(發身)하였다. 그러므로 김덕령의 일에 관해서는 이정구의 자손만큼 잘 아는 이가 없다. 내가 일찍이 그 후손 이명한(李明漢)에게서 들었는데, 모두 세속에서 전하는 것처럼 황당한 거짓말이 아니었다. 또 그는‘만약 김덕령의 일을 직접 본 사람이 아니면, 반드시 그 말을 믿으려 할 리가 없을 것이니, 말하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하였다”는 말이 전한다.[『송자대전』 부록 권19]

김덕령이 약관의 나이가 되었을 때 이정구의 아버지 이계(李啓)가 장성현감으로 있었다. 마침 단오절에 장흥에서 큰 씨름대회가 열리자, 이웃 몇 고을의 수령들이 모두 장성에 모였다. 호남에는 단옷날이면 관아의 마당에 모여 씨름판을 벌여 1등을 하는 자에게 후한 상을 주는 풍속이 있었다. 그러므로 전국의 씨름 장사들이 모여 들었고, 먼 데 사는 백성들 가운데에는 식량을 싸 가지고 구경을 오는 자도 많았다. 그날 장성에 모였던 씨름 장사들 가운데 어떤 장사 하나가 많은 장사들을 연달아 이기고 혼자 어깨춤을 추면서 큰소리치기를, “만약 나와 힘을 겨룰 자가 있다면 당장 나와서 승부를 결판내자”고 하였다. 그때 문밖에서 어떤 선비가 문안으로 들어오려다가 그 소리를 듣고 들어오지 않고 머뭇거렸다. 수령들이 이 말을 듣고 빨리 그 선비를 맞아들이도록 했는데, 그가 바로 김덕령이었다.

수령들이 술과 안주를 권하면서 “자네가 만약 저 사람을 이긴다면, 얼마나 통쾌한 일이 되겠는가”고 하였다. 그러나 김덕령은 굳이 사양하면서, “저는 본디 유생(儒生)이고 몸마저 허약한데 어떻게 저 사람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하고 사양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계속 권해 마지않으므로, 김덕령이 초립(草笠)과 도포(道袍)에 신발을 신은 채 뜰 아래로 내려갔다. 사람들이, “어째서 신을 벗지 않는가”라고 하자, 김덕령이, “어쨌든 한 번 시험해 보겠습니다”고 하였다. 그 장사가 마치 어린애처럼 김덕령을 깔보는 말을 많이 하자, 김덕령이 “그대는 많은 말을 하지 말라. 힘만 겨루어 보면 되는 것이다”고 하자, 그 장사가 김덕령의 허리를 안아 들고 몇 바퀴 돌리다가 땅에 집어던졌다. 김덕령이 몸을 날려 공중을 한 바퀴 회전하여 선 채로 착지하였는데, 그의 두 발은 마른 땅에 한 자쯤 빠져 들어갔으나 꼿꼿하게 서서 넘어지지 않았다. 그 장사는 비로소 두려워하는 기색을 보였고, 다시 어울리게 되어서는 김덕령이 한 번 휘둘러 그 장사를 쓰러뜨리니, 그 장사가 “내가 실수했다”고 하면서 다시 대결하자고 하였다.

그러자 김덕령은 눈에서 불빛이 번쩍 나며 호랑이의 포효처럼 소리를 지르고 장사를 죽이고자 덤볐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크게 놀라며 일제히 소리를 쳐서 이를 제지시켰고, 그 뒤로 김덕령의 명성이 온 세상에 알려졌다. 이리하여 이정구의 집안에서 김덕령을 천거하여 마침내 등용되었던 것이다.[『송자대전』 부록 권18]

묘소와 후손

묘소는 전라도 광주무등산 이치(梨峙)에 있었는데, 1965년 광주시 북구 충효동무등산 기슭으로 옮겼다. 무덤을 이장할 때 김덕령 장군 수의(壽衣)·철릭 등의 유물이 발굴되어, 그 중 수의 등 8점이 중요 민속자료 제 111호로 지정되었다. 1975년 ‘충장공 김덕령 장군 유적보존회’가 김덕령 무덤 앞에 충장사(忠壯祠)를 복원하고, 유물관에 수의와 친필 서간 등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1661년(현종 2) 김덕령은 억울하게 죽은 지 65년 만에 신원되어 관작이 복구되었고, 1668년(현종 9) 병조 참의(參議)에 추증(追增)되었다. 이때 이민서(李敏叙)가 구전되는 자료를 모아 『김덕령장군전(金德齡將軍傳)』을 지었다. 1678년(숙종 4) 광주의 벽진서원(碧津書院)에 제향 되었고, 1679년(숙종 5) 나라에서 벽진서원을 의열사(義烈祠)라고 사액(賜額)하였다. 1681년(숙종 7) 병조 판서(判書)에 추가 증직되었으며, 영조(英祖) 대에는 의열사에 형 김덕홍과 아우 김덕보도 아울러 배향 하였다.

1788년(정조 12) 김덕령에게 ‘충장공(忠壯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는데, 당시 정조는 의열사에서 김덕령의 제사를 영구히 지내고 절대로 신주를 옮기지 말라는 부조특명(不祧特命)을 내렸다. 또 김덕령이 태어난 석저촌을 충효리로 개명하였다. 1789년(정조 13)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에 추가 증직되었으며, 이어 정조의 명에 따라 「김충장공유사(金忠壯公遺事)」를 편찬하였고, 정조는 친히 책의 서문을 썼다. 이때 홍석주(洪奭周)가 「김충장공유사」의 내용을 그대로 참고하여 「증좌찬성충장공김덕령신도비명(增左贊成忠壯公金德齡神道碑銘)」을 지었다.

부인 흥양 이씨(興陽李氏)는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담양의 추월산(秋月山)으로 피난을 하였다가 왜구를 만나자 몸을 더럽히지 않고자 보리암(菩提菴) 절벽 아래로 뛰어내려 순절(殉節)하였다. 부인은 남편 김덕령의 무덤에 합장되었는데, 자녀가 없어서 제사를 받들 후사(後嗣)가 없었다. 동생 김덕보(金德普)가 외아들 진사(進士) 김거(金璩)에게 김덕령 부부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일성록(日省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서하집(西河集)』
  • 『연천집(淵泉集)』
  • 『김덕령장군전(金德齡將軍傳)』
  • 『김충장공유사(金忠壯公遺事)』
  • 『임진록(壬辰錄)』
  • 『조야집요(朝野輯要)』
  •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
  • 『난중잡록(亂中雜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석주집(石洲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서애집(西厓集)』
  • 『후광세첩(厚光世牒)』
  • 『고대일록(孤臺日錄)』
  • 『우계집(牛溪集)』
  • 『지산집(芝山集)』
  • 『홍재전서(弘齋全書)』
  • 『혼정편록(混定編錄)』
  • 『매산집(梅山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