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간(金簡)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17세기 만주로 이주한 신달리 가문의 후손으로 청의 이부 상서를 지낸 인물.

개설

김간은 1761년 청나라 총관내무부대신(總管內務府大臣), 1763년 종2품 호부(戶部) 시랑(侍郞), 1767년 종1품 공부(工部) 상서(尙書), 그리고 1781년에는 이부(吏部) 상서(尙書)에 오르는 등 주요 관직을 두루 맡으면서 건륭제의 측근으로 활약한 관료였다.

가계

조선에서는 김간이 정묘·병자호란의 전란 속에서 의주가 함락되자 포로가 되어 청으로 끌려간 가문의 후손으로 알려졌다(『정조실록』 10년 9월 18일). 그러나 청건륭제의 지시로 편찬된 『통보(通譜)』에 따르면, 김간은 자발적으로 청에 귀화한 신달리 가문의 후손으로 그의 조부는 신달리의 동생 삼달리(三達理)이며, 아버지는 정3품 무비원경(武備院卿)을 지낸 김삼보(金三保)였다. 한편 그의 종속부 김상명(金常明)은 영조의 세자 책봉, 『명사(明史)』에 인조반정을 찬탈로 서술하는 것을 차단하는 데 막후에서 힘을 쓴 인물이었다. 그의 아들 김온포(金縕布)도 관료가 되어서 총관내무부대신(總管內務府大臣), 병부(兵部) 시랑(侍郞), 공부 상서, 호부 상서를 역임하였으며, 『청사고(淸史稿)』 열전에는 김간과 그의 아들 김온포가 함께 수록되었다.

활동 사항

김간은 공부 상서로 재직 중에 화재로 불탄 궁궐 북랑(北廊)을 10일 만에 재건함으로써, 건륭제의(에게) 깊은 신임을 받았다고 전해졌다(『정조실록』 7년 3월 24일). 건륭제가 김간을 신임한 데에는 그의 능력도 인정받았지만 그의 누이동생이 황제의 후비인 숙가황귀비(淑嘉皇貴妃)였기 때문이다(『정조실록』 9년 3월 22일). 한편 1773년에는 사고관무(四庫館務)의 독촉검사(督促檢事)를 하는 사고전서관의 부총재(副總裁)를 역임하면서, 『사고전서』를 활자로 개간하는 사업을 주도하였다. 아울러 활자 인쇄의 격식을 정리한 서적의 편찬을 주관함으로써, 중국 문헌학과 인쇄술의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김간은 조선 관리들에게 의주에 있는 선조들의 무덤을 잘 돌보아 줄 것을 부탁하였으며,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조선인의 의관을 갖춘 초상화를 그려 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였다(『정조실록』 10년 9월 18일). 청조에서 정조가 외종조부 홍인한을 숙청한 사실을 문제 삼지 않도록 막후에서 조정하였으며, 조선 사절단이 북경에 머물 때마다 접대를 아끼지 않았다(『정조실록』 17년 2월 22일).

저술 및 작품

『책산(策算)』, 『황도총성도(黃道總星圖)』, 『의상고성(儀像考成)』, 『예감록(睿鑑錄)』

상훈 및 추모

1794년 가경제가 김가씨(金佳氏) 성을 내렸다.

참고문헌

  • 『청사고(淸史稿)』
  • 임종욱 편, 『중국역대인명사전』 , 이화문화사, 2010.
  • 우경섭, 「17세기 전반 만주(滿洲)로 귀부(歸附)한 조선인들: 『팔기만주씨족통보(八旗滿洲氏族通譜)』를 중심으로」, 『조선시대사학보』 48, 2009.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