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추(騎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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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달리며 짚으로 만든 인형에 활을 쏘는 마상무예의 일종.

개설

기병들이 말을 달리며 활을 쏘아 짚 인형[芻人]에 화살을 맞히는 마상무예의 일종이다. 기병들이 말을 달리며 활을 쏘는 마상무예는 표적(標的)에 따라 몇 가지로 구분된다. 첫째, 기사(騎射)는 조선전기에 주로 활용한 것으로 둥근 원형 표적을 향해 활을 쏘는 것이다. 둘째, 기추(騎芻)는 조선후기에 활용한 것으로 짚 인형으로 표적을 대체하여 실용성을 높인 것이다. 셋째, 모구(毛毬)는 선도 기병이 둥근 털공을 끌고 달려가면 후위기병이 쫓아가며 활을 쏘는 것이다. 넷째, 삼갑사(三甲射)는 세 개의 조로 나뉜 기병이 서로 뒤를 쫓으며 상대의 몸을 향해 붉은색 물감을 묻힌 화살을 쏘는 것이다. 두 조로 나눌 경우 갑을사(射乙射)라고도 불렀다.

연원 및 변천

기추는 조선후기 임진왜란 시기에 기병들이 익혔던 마상무예의 일종으로 단순한 표적의 형태를 사람 형상의 짚으로 만든 인형인 추인(芻人)으로 대체하면서 생긴 명칭이다. 조선전기에는 단순하게 표적이라고 하여 지상에서 일정 높이만큼 올라간 기둥에 둥근 원형 판을 부착하여 말을 달리며 활을 쏘았다. 이를 기사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의 활쏘기 방법은 실용성에서 많은 문제점이 발생하였다. 예를 들어 말을 달리며 활을 쏘는 무예는 움직이는 적을 향해 공격하는 것인데, 기존의 원형 표적은 잘 쏘아 맞히기 위하여 몸통보다는 머리가 과대하게 큰 표적을 사용했던 것이다. 특히 임진왜란 중 말을 달리며 활을 쏘는 무예는 과녁으로 인하여 실용성에 대한 의문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대표적으로 선조는 말을 달리며 활을 쏠 때 과녁을 말의 배 밑에 설치하고 굽어보며 쏘는데, 적이 어찌 말의 배 밑에 숨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표적의 형태와 위치에 의문을 제기하고 실용성을 위하여 표적을 짚 인형으로 대체하도록 하였다(『선조실록』 26년 10월 22일).

이러한 표적의 변화는 무과 시험을 중심으로 변화하였고, 선조대에는 관무재를 비롯한 실제 군사들의 훈련에서 기사와 기추 두 가지가 함께 활용되기도 하였다. 효종도 기사의 방식을 보면 활 쏘는 자세에만 신경을 쓸 뿐이고 전혀 실용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허수아비 인형으로 대체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였다(『효종실록』 2년 6월 19일). 이는 기존의 원형 표적은 2차원적인 평면 형태로 단순히 표적을 맞히는 것에 그치는 것이며, 짚으로 만든 추인으로 형태를 대체할 경우는 3차원적인 입체물에 직접 활을 쏘는 것이라 실용성 면에서 뛰어났기 때문이다. 이후에는 기사라고 표기했을지라도, 그 형태는 짚 인형으로 만든 추인으로 대체한 기추를 훈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정조대에는 단순히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 인형뿐만 아니라 종이로 좀 더 정교하게 인형을 만들어 표적물로 삼기도 하였다(『정조실록』 17년 9월 16일).

형태

무과 시험에서 기사는 좌우에 붉은색과 흰색의 원형 표적을 일정한 거리마다 배치하여 활을 쏘게 하였다. 조선후기에 정착된 기추는 좌우에 각각 다섯 개의 짚 인형을 일정한 거리마다 마주 보게 세우는데, 좌우의 폭은 5보(步)이며 한 열에 세워진 짚 인형의 간격은 35보이다. 좌우로 마주 보게 짚 인형을 세우는 이유는 훈련자 혹은 과거 시험자가 왼손잡이와 오른손잡이로 구별되므로 시험의 공정성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훈련자나 과거 시험자는 짚 인형이 세워진 중앙을 달리면서 좌우에 놓인 추인을 번갈아 가며 한 번씩 쏘았다.

참고문헌

  • 『병학지남연의(兵學指南演義)』
  • 『사법비전공하(射法秘傳攻瑕)』
  • 심승구, 「조선시대의 무예사 연구―모구를 중심으로」, 『군사』38, 1999.
  • 최형국, 「조선시대 기사 시험방식의 변화와 그 실제」, 『중앙사론』24, 2006.
  • 최형국, 「조선후기 기병의 마상무예 연구」, 중앙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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