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청불사(祈晴佛事)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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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기청불사 |
한글표제 | 기청불사 |
한자표제 | 祈晴佛事 |
상위어 | 소재법석(消災法席) |
동의어 | 기청법회(祈晴法會), 기청도량[祈晴道場], 기양법석(祈禳法席) |
분야 | 문화/종교/불교 |
유형 | 의식·행사 |
집필자 | 이성운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기청불사(祈晴佛事)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 4년 7월 25일, 『세조실록』 5년 6월 21일, 『예종실록』 1년 5월 17일, 『태종실록』 9년 7월 5일 |
큰 비가 계속해서 내릴 때 날이 맑아지기를 비는 불교 의식.
개설
고대 사회에서는 비가 그치기를 비는 기청(祈晴) 의식이 기우(祈雨) 의식 못지않게 성행하였다. 조선시대의 기청 의식은 산천과 4대문에서 산천에 제사하는 방식으로 주로 거행되었는데, 불교식으로 기청법회, 기청도량 등이 사찰과 경회루 아래에서 설행되기도 하였다. 법회(法會) 내지 불사(佛事)가 관련 경전 또는 다라니를 읽는 것이 중심이라면, 도량(道場) 의식은 설단(設壇)을 중심으로 한 밀교 의식이라 할 수 있다. 불교식 기청 의식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행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소재기양(消災祈禳) 의식과 비슷한 형태로 거행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연원 및 변천
천인합일(天人合一)을 바탕으로 한 중국의 자연관은 한나라의 동중서(董仲舒)에 의해 체계화된 정치 이론으로 정립된 뒤, 중국은 물론 유교 문화권 전체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이후 유교 문화권에서는 군주의 부덕(不德)을 견책하기 위해 하늘에서 천재지변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여겨왔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에는 가뭄이 들거나 비가 너무 많이 내리면 반드시 종묘사직과 산천에 제사를 지냈다. 조선초에는 불교식 기청 의식도 종종 치러졌는데, 억불숭유 체제가 강화된 조선중기 이후에는 불교식 기청 의식이 완전히 사라졌다.
불교식 기청 의식에 관한 조선시대의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404년(태종 4) 7월 25일에 태종은 흥국사와 낙산사에 내신(內臣)을 보내 기청법회를 열게 하였고(『태종실록』 4년 7월 25일), 1459년(세조 5) 6월 큰 비가 내리자 세조는 경회루 아래에서 기청도량을 개설하였다(『세조실록』 5년 6월 21일). 또 1469년(예종 1) 5월 예종은 장마가 그치지 않자 원각사와 흥천사에서 기청불사를 행하게 하였다(『예종실록』 1년 5월 17일). 총 3회의 기청 의식에 각각 법회, 도량, 불사라는 다른 명칭이 사용되었다. 법회와 불사에는 법문이 포함되는 현교(顯敎) 의식의 특징이 있고, 도량은 설단이 중심이 되는 순수 밀교 의식이라 할 수 있지만, 실록 기사에서는 명칭에 따른 차이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경회루 아래에서 설행한 의식을 도량이라 부른 것으로 보아, 야외에서 설행된 야단법석(野壇法席)과 사찰법석을 구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기청도량이 궁궐 안에서 설행된 것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호불(好佛) 군주인 세조의 의지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예종 이후에는 큰 비가 내릴 때마다 기청제를 빈번히 시행하였으나, 불교식 기청 의식을 설행한 예는 찾아볼 수 없다.
절차 및 내용
기청법회와 기청불사는 현교식, 기청도량은 밀교식 의례라 할 수 있는데, 조선시대 초기에는 두 의식이 고려시대처럼 명확하게 구분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일반적으로 법회와 불사는 작법 절차에 따라 설행되었고, 수륙재와 도량은 근거로 삼은 경전에 따라 설단이 행해졌다. 기우법석이나 기우도량의 경우 『대운륜청우경』 등에 의거해 단을 차렸는데, 기청에 관해서는 특별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천재지변의 재앙을 없애는 다라니나 경전을 염송하는 법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떤 형식으로 기청 의식을 행하였더라도 작법 절차는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작법 절차는 소청(召請), 헌좌(獻座), 공양(供養), 풍경(諷經), 표백(表白)의 순서로 진행된다. 먼저 공양 단을 차리고 법회를 열게 된 연유를 밝히는데, 이때 왕의 행향사(行香使)가 향(香)과 축문(祝文)을 지어 와서 아뢴다. 그런 다음 신불(神佛)의 영험함에 의지하여 소원을 성취하고자 하므로, 재앙을 소멸해 주는 신불을 청해 모셔 공양을 올린다.
불교식 기청 의식을 거행할 때는 유치(由致)에서 기도의 목적을 밝히고, 신불에게 공양을 올린 다음, 경전과 다라니를 염송한다. 염송과 정근이 끝나면 신불에게 소원을 이루어 줄 것을 청한다.
1409년(태종 9)에 태종은 새벽에 마음이 전일(專一)할 때 향(香)을 전하여 신명(神明)을 섬기는 것이 예(禮)라며, 제문을 늦게 지은 예문관 검열우승범을 옥에 가두었는데(『태종실록』 9년 7월 5일), 이 기사는 기청 의식의 중요성에 대한 왕의 인식을 잘 보여 준다.
참고문헌
- 『대운륜청우경(大雲輪請雨經)』,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脩大藏經) 19.
- 김영태, 『한국불교사』, 경서원, 1986.
- 서윤길, 『한국밀교사상사』, 운주사, 2006.
- 김용조, 「조선전기의 국행기양불사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