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장현(機張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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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에 기원하여 1914년까지 현재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지역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던 조선시대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기장현(機張縣)은 신라시대의 갑화량곡현(甲火良谷縣)에서 기원했으며, 신라 경덕왕 때 기장현으로 개명되면서 동래군(東萊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시대에도 그대로 기장현이었으며, 울주(蔚州)와 양주(梁州) 등의 속현(屬縣)으로 편성되었다. 기장현에는 이후 감무(監務)가 파견되었다. 조선에 들어와서도 그대로 기장현이라 불렸으며 현감(縣監)이 파견되었다. 1599년(선조 32)에 동래부에 병합되었다가 1617년(광해군 9)에 복구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기장군(機張郡)으로 승격하였으나, 1914년에 동래군에 병합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기장현은 신라시대에 갑화량곡현이었다가 경덕왕 때 기장현으로 개명하였으며, 신라 9주(九州) 중 양주(良州)에 속했던 동래군의 영현으로 편성되었다. 고려시대에도 그대로 기장현이 되었으며, 1018년(고려 현종 9)에 울주의 속현이 되었다가, 후에 감무가 파견되었다. 『고려사』「지리지」에는 양주의 속현으로 기재되었지만, 기장현이 언제 양주의 속현이었는지는 명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조선에 들어와서도 여전히 기장현이라 불렸으며, 1413년(태종 13)에 감무가 현감으로 개칭되었다.

조직 및 역할

신라시대에 기장현은 동래군의 영현으로 소수(少守) 혹은 현령(縣令)이 파견되었다. 고려시대에 기장현은 양주, 그리고 울주에 소속된 속현이었다. 속현인 기장현에는 중앙에서 별도의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으며, 양주나 울주에 파견된 지방관이 기장현을 관할하였다. 대신 기장현에는 별도로 읍사(邑司)가 설치되어 토착의 향리(鄕吏)들이 읍사에서 자치적으로 지방 행정업무를 수행하였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향리의 권한과 지위가 약화되고, 현감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기장현에는 종6품의 현감과 종9품의 훈도(訓導)가 파견되었다. 18세기의 지리서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기장에는 6품의 무관(武官)이 현감으로 임명되며,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2명, 군관(軍官) 30명, 인리(人吏) 28명, 지인(知印) 11명, 사령(使令) 15명, 관노(官奴) 16명, 관비(官婢) 9명이 편성되었다. 일본과 가까운 해안가의 고을인 관계로 군사적 능력을 갖고 있는 무관이 현감으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도 종6품의 현감이 임명된다는 내용이 있다.

변천

임진왜란의 여파로 인해 1599년에 기장현은 동래부에 합병되었다. 하지만 1617년에 기장현이 복구되었다. 그 밖에 조선시대 기장현의 연혁은 거의 변동이 없다. 1895년에 전국을 23부로 나누었을 때 기장군이 되어 동래부의 관할에 속했다(『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1896년(고종 33)에 13도제가 실시되면서 기장군은 경상남도 관할의 4등군으로 편제되었다. 이후 1914년에 기장군은 동래군에 병합되고 기장면이 되었다. 조선시대 기장현의 관아가 위치했던 곳은 현재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동부리 일원이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 『대동지지(大東地志)』
  •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