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은제(祈恩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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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에서 영험한 산천에 무당을 보내어 복을 빌던 의례.

개설

기은제는 영험한 곳으로 이름난 산천에 가서 거행하는 제사를 가리킨다. ‘제(祭)’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지만 기은의 형식과 내용은 무속에 가깝다. 기은은 왕실과 민간 모두 행하던 풍속이었지만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기은은 대부분 왕실에서 거행한 내행기은(內行祈恩)이다. 이것은 왕실에서 영험한 곳으로 이름난 산천에 무당을 보내어 왕실의 안녕을 비는 기도이다.

내용 및 특징

조선시대에 국가 제사는 왕의 명을 받은 관리가 담당하며 봉상시(奉常寺)와 전생서(典牲署)에서 제물과 희생을 준비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에 반해 내행기은은 내전(內殿)에서 무당이나 내시를 통해 의식을 주관하게 하고 경비도 왕실의 재정을 담당하는 내수사(內需司)에서 조달하였다. 의례의 대상인 산천신은 사전(祀典)에 오른 것도 있지만 이와 무관하게 고려시대부터 영험한 곳으로 알려진 곳들이 전승되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기은처로는 덕적(德積)·백악(白岳)·송악(松岳)·목멱(木覓)·감악(紺岳)·개성(開城) 대정(大井)·삼성(三聖)·주작(朱雀) 등이 있다.

변천

기은이란 용어는 『고려사(高麗史)』에도 자주 나온다. 별기은(別祈恩), 별기은소(別祈恩所), 기은색(祈恩色), 기은도량(祈恩道場), 기은별감(祈恩別監), 기은사(祈恩使) 등의 용례에서 알 수 있듯이 기은은 불교와 친화력을 가지고 있으며, 국가 차원에서 거행하는 의식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기은은 무속과 연관되어 주로 언급되었고, 국가의 공적인 제향에서 배제된 왕실의 행사로 간주되었다. 기은의 대상은 산천이 대부분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기은은 대부분 유명 산천의 신들에게 복을 비는 무속 의례를 가리킨다. ‘기은’이란 용어에 ‘제(祭)’를 붙여 사용하게 된 것은 유교의 영향이지만 유교식 제사라기보다 무속의 굿에 가깝다. 중종대에 이르러기은제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1512년(중종 7)에 함흥본궁에 기은을 거행하기 위해 가던 무당들이 사복시(司僕寺)의 말을 사용한 후 돌려주지 않고 사적으로 사용한 것이 빌미가 되어 유신(儒臣)들이 기은의 폐지를 주장하면서 기은제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중종실록』 7년 4월 12일). 이후 본궁의 제향은 무당을 배제하고 내수사 종사자들에 의해 거행하였지만, 여타의 기은 행사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조선후기 기은제의 모습은 『조선왕조실록』에는 잘 보이지 않으나 발기[件記]를 통해 알 수 있다. 왕실에서 기은제를 행한 후 무속인에게 지급한 옷감 등의 경비가 발기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 최종성, 『조선조 무속 구행의례 연구』, 일지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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