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녀(妓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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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연회에서 예술적 재능으로 흥을 돋우는 최하층 여성.

개설

조선시대 기녀는 여악(女樂)으로서 연회에서 춤추고 노래하여 흥을 돋우는 역할을 하였다. 이들의 역할은 선택이 아니라 국역(國役) 체계 속에서 역을 담당하는 것이었다. 기녀는 관안(官案)에 등재되어 국역에 편성된 공적인 존재로, 최하층 여성인 동시에 최고의 예능인이라는 양면성을 가졌다.

담당직무

기녀는 소속처에 따라 장악원에 속한 경기(京妓)와 영진(營鎭)을 비롯한 지방 관아 소속의 관기(官妓)로 구분된다. 일반적으로 기녀는 사신이 행차하였을 때나 왕실의 중요한 행사에 동원되었다. 또한 왕이 순행(巡幸)할 때는 어가를 환영했고, 지방 관아에서 베푸는 연회에서는 가무와 악기 연주를 담당했다. 경우에 따라서는 양반이 주관하는 개인적인 연회 자리에도 동원되었다.

기녀의 규모는 국가의 여악정책(女樂政策)에 따라 크게 변하였는데 일반적으로 경기는 100~300명 정도에 이르렀으며, 관기는 군현별로 20~60명 정도를 유지하였다. 기녀 제도는 연산군대에 가장 번성하였으며 인조반정을 계기로 여악이 정면으로 비판받으면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로써 1623년(인조 1) 경기가 혁파되어 지방의 관기만 남게 되었다. 이후로 중앙에서는 기녀가 필요할 때 지방의 관기를 뽑아서 충원하였는데 이를 선상기(選上妓)라고 한다. 또한 변방에서는 관비(官婢)가 관기의 역할을 대신하기도 하였다.

기녀는 관비 중에서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예술적 재능을 갖춘 자로 선발하였다. 즉, 관기의 모집단이 관비이므로 결국 관기는 관비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기녀의 교육은 지방 관아의 교방에서 담당하였는데 교방에서는 기녀의 교육 뿐 아니라 관련 업무도 처리하였다.

기녀의 입역 체계는 관노비와 마찬가지로 입번제(入番制)에 의하여 운영되었다. 입번제란 일정 인원을 하나의 조로 묶어 이들이 교대로 역을 지는 것을 말한다. 이들 관기 중의 일부가 입번하지 않는 비번(非番)에 개인적으로 사설 영업을 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중앙에 소속된 기생, 즉 경기에게는 봉족(奉足)이 지원되었으며, 『경국대전』에 의하면 관기의 입역은 16세에 시작하여 50세까지 행하였다. 관기에서 물러나면 퇴기(退妓)가 되어 60세까지 관비의 역을 지게 되었다.

기녀는 양반 남성을 상대하기 위하여 예술과 문학적 기질을 갖추었다. 따라서 이들을 가리켜 말을 알아듣고 이해하는 꽃이라 하여 해어화(解語花)라 불렀다. 그러나 이들의 성(性)은 누구나 공유할 수 있기에, 누구나 쉽게 만지고 꺾을 수 있는 길가의 버들과 담 밑의 꽃이라는 의미에서 노류장화(路柳墻花)라 하기도 하였다(『연산군일기』 11년 12월 7일). 이들은 연회 자리에서 분을 두텁게 바르는 등 꾸밈이 화려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들의 행색을 가리켜 얼굴 모양이 마치 가면을 쓴 것 같다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기녀의 남편인 기부(妓夫)는 기녀에게 필요한 수발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기녀는 일반적으로 두 개의 이름을 갖고 있다. 본래의 관비명을 향명(鄕名)이라 하고, 기녀가 된 뒤에 갖게 된 이름을 기명(妓名)이라고 한다. 이들은 혼인을 통하여 자녀를 낳을 수도 있었으나 이들의 혼인은 매우 불안정한 것이었다. 비록 남편이 있더라도 부인이 지속적으로 역을 져야 하므로 부부가 헤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기녀가 처음으로 성관계를 맺어 본격적으로 역을 행하게 되는 행위를 상계(上笄)라고 하는데 이는 기녀가 성인이 되는 통과 의례라고 할 수 있다.

관기와 관비는 담당하는 일과 역할을 서로 공유하기도 하였다. 관기와 관비 사이에 일정한 위계가 존재하였으며, 기녀가 잘못을 저지를 경우 관비로 떨어질 수 있었고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다.

변천

기녀 제도는 국가의 여악 정책과 성리학의 심화 정도에 따라 변화되었다. 기녀 제도는 연산군대에 제도적으로 완성되나 인조반정을 계기로 여악에 대한 비판이 일면서 축소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을 계기로 장악원 소속의 경기가 혁파되자 지방 관아 소속의 관기만 남게 되었다. 이후에 중앙에서는 기녀가 필요할 때마다 지방에서 선상기를 뽑아서 활용하였다.

참고문헌

  • 우인수, 「『부북일기』를 통해 본 17세기 출신군관(出身軍官)의 부방(赴防) 생활」, 『한국사연구』96, 1997.
  • 이규리, 「『읍지』로 본 조선시대 관기 운용의 실상」, 『한국사연구』130, 2005.
  • 이성임, 「일기를 통해 본 조선시대 기녀의 입역과 운용」, 『대동한문학』30, 2009.
  • 정연식, 「조선시대 기역의 실태」, 『국사관논총』107, 2005.
  • 禹仁秀, 「朝鮮王朝妓生の管理體系とその流出の樣相」, 『東洋文化硏究』9,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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