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장(禁葬)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다른 사람이 묘 쓰는 것을 금지하는 행위.

개설

조선시대 금장(禁葬)의 대상과 범위는 법으로 규정하였으나, 성리학적 효 의식이 풍수설과 결합하여 분묘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투장(偸葬)이 성행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국가에서는 금장에 대한 규정을 강화시키면서 투장을 억제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분산 수호자들은 투장으로 위기에 직면하는 동시에 금장 구역의 불법적인 확대와 금장 과정에서 물리적 힘의 사용으로 사회 문제를 일으켰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시대는 산림천택에 대하여 백성과 함께 공유한다는 이념 하에 백성들이 자유롭게 활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다만 왕과 왕실의 분묘가 있는 능원(陵園), 도성 밖 10리 이내 지역, 국용목(國用木) 충당을 위한 금산(禁山) 등 일부 산림에 대해서는 백성들의 출입을 제한하고 금장하였다. 특히 도성 10리 안쪽은 임금이 농사짓는 것을 관찰하고 유람하러 거둥하는 곳이므로 분묘가 있으면 마음이 편치 않다는 인식이 강하게 반영되었다. 중국 조정의 사신이 지나가는 길가에도 분묘를 쓰지 못하였다(『문종실록』 2년 3월 3일). 인가로부터 100보 이내에서도 장사지내는 것을 금지하였다. 개인 분산에 대해서도 품계에 따라 묘지 넓이를 상세히 정하여 금장할 수 있는 권한을 법적으로 보장하였다(『세종실록』 7년 5월 12일). 그런데 16세기 이후 종법 질서가 형성되고 성리학적인 의례가 정착하면서 조상의 분묘를 명당자리에 쓰려는 묏자리 풍수가 성행하였다. 이는 국가의 금지 구역이나 다른 사람의 분산을 침범하여 묘를 쓰는 투장의 폐단으로 이어졌다. 이에 따라 국가에서는 17~18세기를 거치며 금장 구역을 재정비하고 투장에 대처하기 위한 정책을 적극 추진하였다.

내용

조선후기 투장이 사회 문제로 대두하면서 왕실의 능원, 성저십리(城底十里), 금산 등을 보호하기 위하여 금장 구역을 재정비하고 투장을 규제하는 정책을 강화하였다. 능원에 대해서는 1718년(숙종 44)에 이르러 해자(垓子) 바깥을 경계로 삼아 화소(火巢) 안에 투장하는 것을 일체 금장하였다. 다만 해자 밖에 위치한 사대부의 분묘는 그대로 두기로 결정하였다. 정조대에는 화소 밖이라 하여도 능에서 앉거나 서서 보이는 곳은 석물을 철거하고 이장할 것을 명하였다(『정조실록』 4년 10월 18일). 성저십리는 『수교집록(受敎輯錄)』에 의하면 1652년(효종 3)에 도성 밖 10리 안쪽에 묘를 쓰는 것을 일체 금단하였는데, 『속대전(續大典)』에서 금장 범위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동쪽은 대보동(大菩洞)에서 수유현(水踰峴), 우이천(牛耳川), 상·하벌리(上·下伐里), 장위(長位), 송계교(松溪橋)를 거쳐 중량포(中梁蒲)에 이르기까지 개천으로 경계를 삼았다. 남쪽은 중량포에서 살곶이다리[箭串橋], 신촌(新村), 두모포(豆毛浦)를 거쳐 용산(龍山)에 이르기까지 개천과 강으로 경계를 삼았다. 북쪽은 대보동에서 보현봉(普賢峯), 저서현(猪噬峴), 아미산(峨眉山), 연서(延曙), 구관기(舊館基), 대조리(大棗里)를 거쳐 돌곶이고개[石串峴] 서남쪽 합류하는 곳에 이르기까지 산등성이로 경계를 삼았다. 서쪽은 돌곶이고개에서 시위동(時威洞), 사천도(沙川渡), 성산(城山), 망원정(望遠亭)을 거쳐 마포(麻浦)에 이르기까지 개천과 강으로 경계를 삼았다. 이 경계에 금표(禁標)를 설치하고 구역 안에 묘를 쓰면 능원의 나무를 투작한 율[盜陵園樹木之律]에 의거하여 처벌하고 묘를 파냈다. 이후 정조대의 『대전통편(大典通編)』에서는 금표 안에 투장을 하면 정배(定配)에 처하여 처벌을 더욱 강화시켰다. 국용목(國用木)의 수요를 충당하기 위하여 지정한 금산에서도 일반인의 투장을 엄격히 금지하였다.

한편 마을이나 인가 근처, 개인 분산도 금장 구역에 해당하였다. 마을과 인가는 1703년(숙종 29)에 한 사람이 사는 집이라도 100보 이내의 구역은 묘를 쓸 수 없도록 금장을 강화시켰다. 개인 분산에 대해서는 조선초기부터 분묘를 근거로 보수(步數)를 정하고 분산 수호자들에게 금장할 수 있는 권한을 법적으로 보장하였다(『태종실록』 4년 3월 29일).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왕실의 자손으로서 종친들은 1품의 경우 분묘를 중심으로 사면 각 100보, 2품 이하는 10보씩 체감하여 6품은 사면 각 50보를 금장할 수 있었다. 문무 관료는 1품의 경우 사면 각 90보, 2품 이하는 10보씩 체감하여 6품은 40보를 보장하고, 7품 이하는 6품에 준하여 40보를 금장 구역으로 인정하였다. 또한 관료층이 아니더라도 생원·진사 및 유음자제(有蔭子弟)들은 6품에 준하여 금장의 권한을 허용하였다.

『경국대전』의 규정은 품계에 따라 금장 범위를 다르게 설정한 차등보수(差等步數)의 특성을 띠었다. 또한 생원·진사 및 유음자제들까지 금장 범위를 인정함으로써 일반인의 분산에 대해서는 양반 사족 층에 한정하여 금장할 수 있는 권한을 보장하였다. 그런데 16세기 이후 종법 질서가 본격화되면서 『경국대전』의 차등보수는 점차 확대되는 추세였다. 사대부들은 분묘를 중심으로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의 금장 범위를 관철시켜갔다. 그 결과 이러한 추세는 숙종대에 이르러 국가의 공인을 획득하고 『속대전』에 정식 법 조항으로 수록되었다.

변천

사대부의 분산은 『경국대전』과 『속대전』에 의거하여 법적으로 금장 구역으로 보호받았다. 분산 수호자들은 조선후기 투장의 성행으로 위기에 처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법적인 보장 범위를 넘어서 금장하는 광점(廣占)의 폐단을 일으키고 있었다. 『속대전』에서는 법리상 부당한 곳을 금장하여 소송에 패소하게 되면 형장(刑杖)을 쳐서 징계하도록 규정하였다. 또한 금장하는 과정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자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형태를 제시하면서 엄격히 논죄하였다. 역군(役軍)을 보내 금장하며 싸우거나 칼을 뽑고 포 또는 활을 발사하면 장 100·도 3년, 그 과정에서 상해를 입히면 장 100·유 3,000리에 처하였다. 무리를 지어 상여를 부수면 무덤을 팠으나 관곽에는 이르지 않은 율[發塚未至棺槨律]에 의거하여 논죄하였다. 그 외에도 분묘 구덩이를 파서 회칠한 부분을 훼손한 경우, 구덩이에 방화하거나 오물을 던져 넣는 경우, 봉분에 방화하거나 막대기를 꽂는 등의 경우도 논죄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법적인 규제에도 불구하고 조선후기 광점의 성격을 띠는 금장은 감소하지 않고 갈수록 확산되어 투장과 함께 산송(山訟) 발생의 주요 요인이 되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수교집록(受敎輯錄)』
  • 김경숙, 『조선의 묘지소송』, 문학동네, 2012.
  • 김경숙, 「조선후기 山訟과 사회갈등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2.
  • 전경목, 「조선후기 산송연구」, 전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6.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