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암(보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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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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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금강암 |
한글표제 | 금강암 |
한자표제 | 金剛庵 |
상위어 | 불교(佛敎), 사찰(寺刹) |
동의어 | 금강굴(金剛窟) |
관련어 | 보현사(普賢寺), 이인좌(李麟佐), 황진기(黃鎭紀), 현기(玄機) |
분야 | 문화/종교/불교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집필자 | 이종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금강암(金剛庵)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영조실록』 13년 1월 9일 |
평안북도 향산군묘향산 보현사의 산내 암자.
개설
금강암(金剛庵)은 묘향산 보현사의 산내 암자로서 금강굴(金剛窟)이라고도 불렸다. 창건 시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조선중기 서산 대사 청허휴정이 주석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고 바위굴을 이용해 지붕을 이어 만든 건물로 유명하다.
내용 및 특징
금강암은 평안북도 향산군묘향산 보현사(普賢寺)의 산내 암자인 영신암(靈神庵)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암자이다. 커다란 바위 밑에 건축되어 자연적인 바위와 인위적인 지붕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이 때문에 금강굴로도 불렸다. 창건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으나 서산 대사 청허휴정(淸虛休靜)이 주석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영조대에 승려 현기(玄機)가 금강암에 거처하고 있던 법훈(法訓)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는데, 훗날 첩문(帖文)을 위조한 도둑으로 체포되어 여러 사람을 무고(誣告)하였다. 현기가 스승 법훈에 대해 말하기를, 1728년(영조 4) 이인좌의 난 때 도망친 황진기(黃鎭紀)가 머리를 깎고 출가하였는데, 그 사람이 바로 법훈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금강암에 거처하던 두 명의 법훈을 조사한 결과 거짓으로 판명되었다(『영조실록』 13년 1월 9일).
참고문헌
- 사찰문화연구원 편저, 『북한사찰연구』, 사찰문화연구원 출판부,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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