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후(近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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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과 시험의 세 번째 시험인 철전의 과녁으로 활용된 사각형 천으로 된 목표물.

개설

무과 시험의 세 번째 실기 시험인 철전(鐵箭)을 쏠 때 사용한 과녁을 이르는 말이다. 철전은 속칭 ‘육량전(六兩箭)’이라고 불릴 만큼 일반 화살보다 크고 무거운 화살을 쏘는 시험이었다. 사용하는 활 역시 일반 각궁보다 힘이 센 육량궁 혹은 정량궁으로 시험을 보았다. 또한 일반 보사처럼 제자리에 서서 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한 번 도약하듯 달려가며 쏘았다.

연원 및 변천

근후(近侯)는 무과 실기 시험의 세 번째 시험인 철전에 활용된 과녁의 이름으로 중후(中侯)와 원후(遠侯)보다 가까이 설치된 활 과녁이라는 뜻이다. 몇 겹의 천을 덧대어 사용하고 푸른 바탕의 정중앙에 작은 사각형을 두었는데 그 중심부에 돼지머리[豕首] 그림을 흰색 가죽으로 덧대어 만들어 쏘게 하였다. 보사의 마지막 세 번째 시험으로 활용된 근후는 가장 가까운 과녁으로 세종 대 이전에는 사단에서 85보 위치에 설치하였다가 1428년(세종 10)부터 80보로 거리를 줄였다. 과녁의 크기는 높이와 너비가 4척 6촌이며, 중앙에 원후와 같이 돼지머리를 그린 흰색 가죽을 덧대어 사용하였다. 첫 번째 시험은 원후라 해서 240보 거리에 표적을 세워 나무 촉을 사용하는 목전(木箭)을 쏘았다. 원후의 크기는 높이와 너비가 1장 8척이며, 그 너비를 3등분해서 정중앙에 정곡(正鵠)이라 하여 사방 6척의 사각형 흰색 가죽을 덧대고 돼지머리를 그렸다. 원후는 가장 먼 거리이기에 원후가 설치된 좌우 50보 거리에 깃발을 세워 표적을 확실히 구분하도록 하였다. 역시 원후의 뒤쪽 90보에도 좌우 70보 거리에 깃발을 세워 표적으로 삼았다(『세조실록』 2년 2월 21일).

형태

포를 여러 겹 덧대어 화살이 뚫리지 않도록 만들었으며, 청색포(靑色布)로써 바탕을 하여 높이와 너비가 4척 6촌으로 원후와 중후에 비해 크기가 가장 작았다. 정곡은 사방이 4척 6촌 정도에 돼지머리를 그린 흰색 가죽을 붙여 사용하였다. 좌우에 기둥을 세워 사방을 기둥에 묶어 사용하였다.

참고문헌

  • 『무과총요(武科總要)』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임선빈·심승구 외, 『조선전기 무과 전시의 고증 연구』, 충남발전연구원, 1998.
  • 심승구, 「조선시대 무과에 나타난 궁술과 그 특성」, 『학예지』10 , 2000.
  • 최형국, 「조선시대 기사 시험방식의 변화와 그 실제」, 『중앙사론』24 , 2006.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