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정문(勤政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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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근정전의 전문(殿門).

개설

근정문(勤政門)은 경복궁 근정전 영역의 문루이다. 중층 구조이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집이다. 1395년(태조 4)에 태조가 경복궁을 창건할 때 처음 건립되었다. 현재의 근정문은 1867년(고종)에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조성된 것으로서 보물 제812호로 지정되었다.

위치 및 용도

조선시대 궁궐은 정전(正殿) 영역, 편전(便殿) 영역, 침전(寢殿) 영역을 중심으로 궐내 각사, 왕실 생활에 필요한 제반 시설, 선원전(璿源殿), 후원 등으로 이루어졌다. 근정문은 경복궁의 정전 영역인 근정전(勤政殿) 영역의 문루로 근정전 남쪽에 있었다. 근정문의 남쪽으로는 광화문(光化門)과 홍례문(弘禮門, 후에 흥례문), 영제교(永濟橋) 등이 있어 경복궁의 의식적 진입 공간을 구성하였다.

광화문과 홍례문 사이가 첫 번째 마당인데, 여기에서는 조참(朝參) 시의 백관 문외위(門外位)가 설치되었다. 홍례문과 근정문 사이가 두 번째 마당으로서 조참 의례가 행해지고 조하(朝賀) 시의 문외위가 설치되었다. 근정문 안쪽이 세 번째 마당으로서 근정전의 전정이었다.

근정문은 정전 문루로서 경복궁 근정전 영역의 입구를 구성하며, 오일조참(五日朝參)에서 왕의 어좌가 놓이는 자리이다. 조참 시에 문무백관은 근정문과 흥례문 사이의 마당에 서며, 조참 이전의 문외위는 흥례문 바깥에 구성된다. 애초에 조참례는 대조하와 같이 근정전에서 설행되는 것으로 정해졌으나, 1440년(세종 22)에 의식을 정비하면서 근정문에서 진행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다음 해 정월에 처음으로 근정문에 나아가 조회를 받았다(『세종실록』 23년 1월 11일). 또한 근정문에서는 단종, 성종, 명종 등이 즉위식을 거행하기도 하였다.

대조하의 설행에서는 근정문을 경계로 의례 공간과 준비 공간이 구분되었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가례(嘉禮)」의 관련 규정에 따르면, 문무백관의 문외위는 근정문 밖에 마련되는데, 문관·무관 1품과 2품은 영제교 북편에 동서로, 3품 이하는 남편에 동서로 각각 자리하며, 왕세자의 막차는 문관의 앞쪽 근정문 가까이에 마련된다. 조하례를 위해 근정전 마당으로 진입할 때 문무관은 3칸의 근정문 좌우의 작은 문으로 출입하고, 왕세자는 근정문 3칸 중 동쪽 칸으로 진입한다. 조하례가 진행될 때에는 근정문을 닫아 의례 공간의 위요감을 형성하였다. 왕의 사자가 궁 밖으로 나갈 때에는 근정문을 경계로 의식이 구분되는 등 근정문은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의 정전 영역의 입구이자 의식의 경계 요소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였다.

변천 및 현황

근정문은 1395년(태조 4)에 경복궁을 창건할 때 처음 설치되었다(『태조실록』 4년 9월 29일). 창건 기사에는 ‘전문(殿門) 3칸’으로만 기록되었고 좌우행랑 각 11칸과 동·서 각루 각 2칸 등이 병기되었다. 이어 경복궁 각 전각의 이름을 정하면서 근정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태조실록』 4년 10월 7일). 근정(勤政)의 뜻은 『서경(書經)』에서 차용하였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867년(고종 4)에 경복궁을 중건할 때 함께 복구하였다. 중건할 때 상량문서사관은 이돈상(李敦相)이었다[『고종실록』 3월 12월 9일 4번째기사]. 1985년 1월 8일에 보물 제812호로 지정되었다.

형태

조선초기 창건 당시에 근정문의 형태는 명확히 알 수 없고 3칸이라는 규모만 알고 있을 뿐이다. 고종대에 중건되어 현재에 전하는 근정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문루 형식이다. 기단을 석조로 낮게 만들고 3단의 계단을 두었으며, 원형의 주초를 놓고 그 위에 원기둥을 세웠다. 기둥은 상층부까지 그대로 올라가는 통주 형식이며 여기에 상층과 하층의 보가 각각 맞보 형식으로 결구되었다. 기둥머리에는 다포작 형태의 공포를 올렸는데, 하층의 경우 내3출목, 외2출목으로, 상층은 내외 모두 2출목으로 구성하여 상하층이 차이가 있다. 주간포작은 각 3개씩 설치되었다. 상층에는 마루를 깔았으며 하층 내목도리 높이에서 우물반자 형태의 천장을 설치하였다. 조선시대의 문루의 보편적 형식과 같이 지붕은 우진각으로 되었으며, 용마루·추녀마루에 양상도회하고 잡상·취두·용두를 얹어 장식미를 살렸다. 부연을 사용한 겹처마이다. 전면의 3단 계단의 중앙부에는 봉황무늬를 넣은 답도를 두었고, 좌우에 해태를 조각한 소맷돌을 설치하였다.

근정문의 좌우로는 행각이 연이어 있다. 애초에는 세로 방향 1칸의 단랑이었는데, 중건할 때 2칸의 복랑으로 바꾸었다. 일화문과 월화문이 동서로 연달아 있는데, 처음 창건할 때 남행랑의 끝단에 있었던 것이 바뀐 모습이다. 일화문과 근정문 사이에 계단을 두어 2층으로 올라갈 수 있게 하였다.

관련사건 및 일화

태종대에 근정전에서 연회를 베풀 때 근정문 외정에 불꽃놀이 기구를 설치하여 구경하도록 하였다(『태종실록』 18년 1월 1일). 세종대에도 주로 정월 초하루에 사신과 함께 화포 쏘는 것을 근정문에서 구경하였다(『세종실록』 12년 1월 1일). 1434년(세종 16)에는 보루각(報漏閣)에 물시계를 설치하면서 경회루 남문·월화문·근정문에 금고(金鼓)를, 광화문에 대종고(大鐘鼓)를 세워 시간을 알렸다(『세종실록』 16년 7월 1일). 근정문에서 단종, 성종, 명종의 즉위식이 거행되는 등(『단종실록』 즉위년 5월 18일)(『성종실록』 즉위년 11월 28일)(『인종실록』 1년 7월 6일) 근정문은 대부분의 중요한 궁중의례에서 행례의 공간이나 영역의 경계로 활용되었다.

세조는 근정전과 모화관(慕華館)에서 군사들이 진법(陣法) 연습하는 것을 살폈는데, 근정전에서는 대고(大鼓)를 울렸고 근정문에서는 대종(大鐘)을 울렸다(『세조실록』 6년 6월 2일). 성종대에는 광화문, 홍례문, 근정문에 이르는 경복궁의 3문에 청기와를 올리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지나치게 사치스럽게 보일 수 있어서 취소되었다(『성종실록』 5년 3월 3일). 중종대에는 근정문에서 생원·진사를 방방(放榜)하기 위해 근정문 어칸 옆에 천막을 쳐 놓고 우의정(右議政)안당(安瑭) 등이 어탑을 마주 보고 지나치게 편히 앉아 예를 갖추지 못하였는데, 이에 대한 추문 여부를 놓고 논란이 있었다(『중종실록』 14년 2월 22일)(『중종실록』 14년 2월 23일)(『중종실록』 14년 2월 24일). 또한 한 백성이 원통한 바가 있어 격쟁하기 위해 광화문 서협, 홍례문, 근정문 동협을 거쳐 정전까지 난입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 때문에 각 문의 수문장 등을 추고하였다(『중종실록』 38년 2월 20일). 한편 근정문 동쪽 수각 모퉁이 기둥에 벼락이 쳐서 기둥이 반으로 부러지고 갈라졌으며, 지붕의 기와가 갈라진 일도 있었다(『중종실록』 39년 7월 24일).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경복궁고도(景福宮古圖)」「경복궁배치도(景福宮配置圖)」「북궐도형(北闕圖形)」
  • 문화재청, 『조선시대 궁궐 용어해설』, 문화재청, 2009.
  • 조재모, 「조선시대 궁궐의 의례운영과 건축형식」,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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