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성진(棘城鎭)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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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극성진 |
한글표제 | 극성진 |
한자표제 | 棘城鎭 |
상위어 | 관방(關防) |
관련어 | 진군(鎭軍), 진보(鎭堡), 야선(也先) |
분야 | 정치/군사·국방/방어시설 |
유형 | 건축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전기 |
왕대 | 조선전기 |
집필자 | 김순남 |
장소 | 황해도 황주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극성진(棘城鎭)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문종실록』 1년 8월 18일, 『문종실록』 1년 1월 23일, 『문종실록』 1년 2월 20일, 『세조실록』 7년 3월 17일, 『문종실록』 1년 5월 5일, 『세종실록』 24년 8월 4일 |
황해도 황주 극성에 설치한 진.
개설
극성은 조선과 명을 왕래하는 사신들의 경유지였다. 당초 몽고야선(也先)의 침입 우려에 따라 1451년(문종 1)에 진을 설치하고 둔전을 두었다. 극성에는 군진(軍鎭)이 없고 당번 진군과 수성군이 둔전을 경작했다. 극성절제사는 황주목사가 겸했다.
위치 및 용도
옛 극성은 황해도 황주의 남쪽 봉산(鳳山)의 양읍(兩邑) 지경에 있었다. 극성은 산으로 가로막혔고 바다에 잇닿아 천혜의 험준한 곳이었다. 황주 이남으로부터는 산세가 험준하여 서쪽으로 뻗어서 평지가 되었고 5리 정도에 바다가 있으니, 그곳이 옛날 극성이었다. 극성으로부터 절령(岊嶺)까지와 절령으로부터 방원(防垣)까지는 산이 험했다. 그에 비한다면 극성은 내지(內地)에 있는 셈이었다. 조선을 침략하는 적이 극성까지 이르려면 의주(義州)·안주(安州)·평양(平壤)의 여러 성을 넘어야 했다.
극성은 평안도를 통행하는 대로(大路)에 있었다. 극성은 요해지로써 관방(關防)의 긴요한 곳이었다. 또한 국가의 문호였다. 조선의 첫째 관문은 평안도 안주의 강이고, 극성이 둘째 관문이 되었다. 중국으로 가는 조선 사신이나 중국에서 오는 사신들은 극성을 경유했다.
극성에는 둔전이 설치되어 있었다. 1451년 극성 서쪽 5리쯤의 옛 단림역(丹林驛) 아래에 묵은 논 21결과 극성 동쪽 8리쯤의 원(院) 머리에 묵은 밭 20결을 둔전의 장소로 정했다(『문종실록』 1년 8월 18일).
변천 및 현황
1451년(문종 1) 1월 야선의 침입에 대비하여 안주·극성 등지에 말뚝을 잇따라 박아 만든 울타리인 목책(木柵)을 설치했다(『문종실록』 1년 1월 23일). 2월에 황해도도체찰사정분(鄭苯)의 계본(啓本)에 따라황주 극성을 황해도 오진(五鎭) 중 완급을 헤아려서 한 진(鎭)을 파하여 옆 가까운 곳에 속하게 하고, 무략(武略)이 있는 사람을 골라서 극성절제사로 황주목사를 겸하도록 했다. 또 극성 근처에 기름진 땅이 많으니, 둔전을 두고 당번한 진군(鎭軍)과 수성군(守城軍)으로 하여금 농사를 짓게 했다(『문종실록』 1년 2월 20일). 1454년(단종 2) 2월에는 황해도 곡산과 토산의 군사를 황주 극성진에 이속시키고, 극성진에 소속된 봉산의 정군과 재령(載寧)의 수성군을 강령진에 이속시키도록 했다.
조선에서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은 도로가 험하고 좁은 절령(岊嶺) 길을 경유하여 다녔기 때문에 지친 말이 많이 죽었다. 이에 1456년(세조 2)에 절령의 한 길을 막고 경천동(敬天洞)·선절령(仙岊嶺) 두 참(站)을 황주·봉주·극성으로 옮겼다.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을 접대하기 위해 황주의 극성진과 수안의 방원진(防垣鎭) 2진에는 구전 군관 각 3인과 노복(奴僕), 그리고 마필이 있었다. 이들의 1년간 비용은 쌀 70석, 황두(黃豆) 86석이었다. 이와 같은 비용은 방수와 관계없이 앉아서 소모되는 군자(軍資)였다. 이에 1461년(세조 7) 3월에 2진의 군관을 혁파했다(『세조실록』 7년 3월 17일). 1462년(세조 8) 6월에는 황주 극성진 진군의 정액을 2백으로 하고 3번으로 나누어 교대케 했다.
1453년(단종 1) 당시 극성은 넓고 멀어서 다 축성하지 못하고, 목책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에 석성(石城)을 수축하고자 황주·봉산 등의 고을 시위패(侍衛牌) 2백 명을 뽑아서 항상 1백 명은 번 들어 수자리를 살게 하고, 1백 명은 돌을 줍게 했다. 돌을 주어 석성을 쌓고자 하는 계획은 세조대부터 추진하고자 했으나 실현되지 못하다가 1476년(성종 7) 5월부터 극성의 축성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극성의 성을 수축하는 일이 긴급하고 긴요한지에 대해 내내 논란이 많았다. 변방 방비의 중요도로 보면 평안도의 다른 곳에 비해 극성은 시급하지 않다고 여겼던 때문이었다.
형태
문종대 목책을 설치했다. 극성문(棘城門)으로부터 황주 사인암(舍人巖) 동변의 높은 봉우리까지의 옛터 3,074척(약 932m)에는 석성이 설치되어 있었다. 벽성(壁城)도 설치했다(『문종실록』 1년 5월 5일). 벽성은 사각형의 네 모서리에 기둥을 세우고 결구시킨 다음, 그 내부에 흙을 채우고 다져서 성체를 구축하는 것으로, 이렇게 계속 연결시키면 성벽이 이루어지게 된다.
관련사건 및 일화
1422년(세종 24) 8월 권극화(權克和)가 황해도감사로 있을 당시 극성에서 전몰 군사의 유골들을 주워 불에 살라서 물에 띄우고 바람에 날리고는 승려들을 불러다가 외로운 영혼을 달래기 위해 공양을 드리는 수륙재를 행한 바 있었다(『세종실록』 24년 8월 4일).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