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인장씨(貴人張氏)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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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귀인장씨 |
한글표제 | 귀인장씨 |
한자표제 | 貴人張氏 |
분야 | 왕족/후궁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광해군~현종 |
집필자 | 홍연주 |
봉작 | 귀인(貴人) |
출신 | 왕족 |
성별 | 여자 |
사망 | 1671년(현종 12) 1월 |
본관 | 해풍(海豊)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
조부 | 장경해(張慶海) |
부 | 장류(張留) |
처_장인 | (남편)인조(仁祖) →무후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귀인장씨(貴人張氏)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인조실록』 13년 3월 11일, 『숙종실록』 12년 3월 25일, 『숙종실록』 12년 2월 27일, 『인조실록』 13년 8월 16일, 『인조실록』 16년 12월 21일, 『인조실록』 18년 8월 27일, 『인조실록』 16년 12월 21일, 『현종실록』 12년 1월 24일 |
총론
[?~1671년(현종 12) = ?]. 조선의 16대 왕인 인조(仁祖)의 후궁. 본관은 해풍(海豊)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 장류(張留)는 선공감(繕工監) 부봉사(副奉事)를 지냈고, 어머니는 알려지지 않는다. 할아버지는 장경해(張慶海)이다.
인조의 후궁
장귀인(張貴人)은 1635년(인조 13) 내려진 숙의(淑儀) 간택령 때 후궁으로 선발되어(『인조실록』 13년 3월 11일),[『승정원일기』인조 13년 7월 21일],[『응천일록(凝川日錄)』 권7] 이현궁(梨峴宮)에서 한 달 간 머문 후 입궁해 숙의에 봉해졌다.(『숙종실록』 12년 3월 25일),(『숙종실록』 12년 2월 27일),(『인조실록』 13년 8월 16일),[『승정원일기』숙종 12년 3월 4일]
1638년(인조 16) 인조가 계비인 장렬왕후(莊烈王后)를 맞아들인 후 소의(昭儀)로 승격되었으며,(『인조실록』 16년 12월 21일) 1640년(인조 18) 다시 귀인(貴人)의 첩지를 받았다.(『인조실록』 18년 8월 27일) 종1품 귀인에까지 오르기는 하였으나, 인조의 또 다른 후궁인 조귀인(趙貴人) 때문에 왕의 사랑은 받지 못했다고 전해진다.(『인조실록』 16년 12월 21일)
1671년(현종 12) 세상을 떠나 예제에 따라 장례가 치러졌다.(『현종실록』 12년 1월 24일),[『승정원일기』현종 12년 1월 22일]
일화
한 기록에 따르면 인조가 장귀인을 맞아들인 다른 일화가 나온다. 인조가 일찍이 꿈에서 한 여자를 보았는데 스스로 장류(張留)의 딸이라 말하고, ‘태평(太平)’이란 글자를 써서 임금께 올렸다. 잠에서 깨어 매우 이상하게 여겨 수소문하여 찾아보니 진사 장류라는 사람에게 과연 딸이 있었다. 이에 후궁으로 뽑아 들이게 한 다음 시험 삼아 글씨를 써보게 하였더니, 곧 ‘천하태평춘(天下太平春)’이라는 다섯 자를 써 올렸다. 그러나 다만 그 꿈과 부합하였을 뿐이고 끝까지 다른 이상한 일은 없었다고 한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29 「인조조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묘소와 후손
장귀인의 무덤은 알려지지 않는다.
장귀인은 인조와의 사이에서 자식이 없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사마방목(司馬榜目)』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응천일록(凝川日錄)』
- 지두환, 『인조대왕과 친인척』, 역사문화,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