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사(歸信寺)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귀신사 |
한글표제 | 귀신사 |
한자표제 | 歸信寺 |
동의어 | 국신사(國信寺), 국신사(國神寺) |
관련어 | 성균학유(成均學諭), 지음승(持音僧), 내수사(內需司), 강도와주(强盜窩主) |
분야 | 문화/종교/불교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전라북도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오경후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귀신사(歸信寺)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명종실록』 8년 3월 14일 |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모악산(母岳山)에 있는 절.
개설
귀신사(歸信寺)는 676년(신라 문무왕 16)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 고려후기 우왕(禑王) 때 왜군이 이곳을 함락시키고 잠시 주둔하였지만, 병마사(兵馬使)유실(柳實)이 격퇴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절에 들어가 쉬고자 했던 성균관의 관원을 귀신사의 승려가 협박하고 모욕을 준 일로, 승려에게 엄한 벌을 주어야 한다는 신료들의 상소가 빗발치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1) 창건
귀신사는 신라시대 창건된 사찰로, 국신사(國信寺) 혹은 국신사(國神寺)라고도 한다. 고려시대 국사 원명(圓明)이 중창한 뒤 건물과 암자가 즐비한 큰 사찰로 유지되었다.
(2) 조선시대
불교 억압 정책이 시행되었던 조선시대에는 성균관 관원과 충돌하여 귀신사의 승려가 한양으로 압송된 일이 발생하였다. 1553년(명종 8) 각종 과거 응시의 예비 심사와 성균관 입학시험에 대한 예비 심사에 관한 소임을 맡고 있었던 성균학유(成均學諭) 유세무(柳世茂)가 절 앞에서 말을 먹이고 절에 들어가 쉬고자 했다. 그러나 귀신사 승려들의 수행을 총책임지는 지음(持音) 소임을 맡고 있었던 승려가 유세무의 멱살을 잡고 가는 대나무로 만든 갓을 찢으며 구타하려 했다. 유세무가 그 이유를 묻자 자신도 높은 작위를 지니고 있다고 하고는 유세무의 하인을 구타하여 머리가 터졌다고 한다(『명종실록』 8년 3월 14일).
귀신사는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것을 1873년(고종 10)에 춘봉(春峯)이 중창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보물 제826호로 지정된 대적광전(大寂光殿)을 비롯하여 명부전·산신각·요사채 등이 있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한우근, 『유교정치와 불교』, 일조각, 1993.
- 진성규, 「조선초기 유학자의 불교인식 -조선왕조실록을 중심으로 -」, 『백산학보』제73호, 백산학회, 2005.
- 최재복, 「조선초기 왕실불교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1.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