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성군준신원복관(龜城君浚伸冤復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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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7년(숙종 13)에 숙종이 난언에 관련되어 유배지에서 죽은 귀성군 이준의 억울한 죄를 풀어 주고 이전의 관직을 복구함.

개설

귀성군(龜城君) 이준(李浚)은 세종의 4남 임영대군(臨瀛大君)이구(李璆)의 2남이다. 그는 세조의 총애를 받은 종친이었는데, 1467년(세조 13)에 발생한 이시애란(李施愛亂)을 진압한 후 정치적으로 급부상하였다. 예종 즉위 초에도 정치적 위상을 유지하였으나, 난언(亂言)에 관련되면서 처지가 위축되었다. 성종이 즉위한 후에는 세간에서 ‘왕이 될 만하다’는 난언의 중심인물이 되었고, 그로 인해 유배되었다가 유배지에서 죽었다. 1687년 6월에 이르러 그의 억울한 죽음이 신원(伸寃)되고 관작이 회복되었다.

역사적 배경

귀성군 이준은 이시애 난을 토벌한 후 적개(敵愾) 1등 공신으로, 28세의 젊은 나이에 영의정이 되었다. 예종대에 남이(南怡)의 옥사가 진정된 후에는 익대공신(翊戴功臣)이자 영의정으로 권력의 핵심에 있었다. 그런데 1469년(예종 1) 6월 임영대군을 수행하면서 그를 돕고 보호하는 일을 하던 반인(伴人) 전중생(全仲生)이 산을 불법으로 개간하다 별시위(別侍衛)이예경(李禮敬)에게 저지당했다. 그러자 전중생은 이예경에게 "장차 신하가 될 자가 우리 궁(宮)을 향하여 박절하게 한다."고 말하였고, 이예경은 이것을 승정원에 고발한 사건이 벌어졌다. 이 일로 전중생은 능지처참(陵遲處斬)되었고, 귀성군은 처벌 받지는 않았지만 그의 처지는 급격하게 달라졌다(『예종실록』 1년 8월 12일).

발단

귀성군의 처지가 위축된 상태에서 1470년(성종 1) 1월에는 생원인 김윤생(金允生) 등이 승정원에 자신이 들은 말을 알렸다. 임영대군 족친인 전 직장(直長) 최세호(崔世豪)가 말하길, 그의 숙부가 귀성군의 뛰어난 자질을 칭송하고 왕위 결정이 잘못되었다고 말했다는 것이었다(『성종실록』 1년 1월 2일).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는 요절한 의경세자(懿敬世子)의 장자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을 배제하고 동생 자을산군(者乙山君)을 예종의 후사로 지명하여 즉위시켰고, 즉위한 어린 성종을 대신하여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고 있었다. 성종이 즉위하였으므로 그의 정통성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이미 기량을 인정받은 귀성군의 자질에 관련된 말들은 정국에 큰 정치적 파장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최세호가 말한 내용과 같은, 귀성군에 대한 권맹희(權孟禧)의 난언이 보태지면서 관련자들에 대한 심문이 시작되었다.

경과

권맹희는 난언의 내용을 다 인정하였다. 아울러 최세호 난언의 진원지가 자신임도 밝혔다. 권맹희와 최세호 두 사람은 능지처참되었다. 누구도 귀성군을 두둔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귀성군은 공신의 명부에서 이름이 삭제되고 경상도 영해(寧海)에 안치되었다가, 유배지에서 사망하였다(『성종실록』 10년 1월 28일).

1687년에 이선(李選)이 귀성군을 신원하고 복관해 주기를 청했다. 대신(大臣) 김수항(金壽恒)도 그의 죄목의 부당성을 극력 진달하여 귀성군에 대한 신원·복관이 이루어졌다(『숙종실록』 13년 6월 5일). 1789년(정조 13)에는 귀성군의 무덤을 경호하게 하였고, 1872년(고종 9)의 보고에 따르면 무안대군(撫安大君)이방번(李芳蕃)의 현손(玄孫)인 회원군(會原君)이쟁(李崢)이 귀성군 이준의 후사로 정해졌음이 드러났다.

참고문헌

  • 정두희, 『조선 초기 정치 지배 세력 연구』, 일조각, 1983.
  • 지두환, 『성종대왕과 친인척 1: 성종세가』, 역사문화, 2007.
  • 김상오, 「이시애의 난에 대하여(상)」, 『전북사학』2, 1978.
  • 김성준, 「종친부고」, 『사학연구』18, 1964.
  • 한충희, 「조선 세조대(1455~1468) 종친 연구」, 『한국학논집』22,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