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제(權踶)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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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권제 |
한글표제 | 권제 |
한자표제 | 權踶 |
분야 | 인물 |
유형 | 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중종~명종 |
집필자 | 계승범 |
자 | 중의(仲義), 중안(仲安) |
호 | 지재(止齋) |
시호 | 문경(文景)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387년(고려 우왕 13) |
사망 | 1445년(세종 27) |
본관 | 안동(安東)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 |
증조부 | 권고(權皐) |
조부 | 권희(權僖) |
부 | 권근(權近) |
모_외조 | 경주 이씨(慶州李氏) : 이존오(李存吾)의 딸 |
형제 | (형)권천(權踐), (동생)권규(權跬), 권준(權蹲) |
처_장인 | 경주 이씨(慶州李氏) : 이휴(李携)의 딸 →(자녀) 6남 1녀 |
자녀 | (1자)권지(權摯) (2자)권남(權擥) (3자)권반(權攀) (4자)권마(權摩) (5자)권혈(權挈) (6자)권경(權擎), (1녀)한명진(韓明溍)의 처, (서1자)권추(權揫) |
저술문집 | 『지재집(止齋集)』, 『역대세년가(歷代世年歌)』, 『영가연괴집(永嘉連魁集)』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권제(權踶)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27년 4월 16일, 『태종실록』 14년 7월 19일, 『세종실록』 27년 4월 16일, 『태종실록』 17년 1월 12일, 『태종실록』 18년 4월 14일, 『태종실록』 18년 4월 6일, 『세종실록』 27년 4월 16일, 『세종실록』 8년 11월 17일, 『세종실록』 12년 6월 5일, 『세종실록』 27년 4월 16일, 『세종실록』 24년 8월 12일, 『세종실록』 27년 4월 16일, 『세종실록』 21년 11월 22일, 『세종실록』 27년 4월 5일, 『세종실록』 27년 4월 16일, 『세종실록』 31년 2월 22일, 『단종실록』 1년 11월 22일, 『세종실록』 27년 4월 16일 |
총론
[1387년(고려 우왕 13)~1445년(세종 27) = 59세]. 조선 초기 태종(太宗)~세종(世宗) 때의 문신. 병조 정랑(正郞)과 예조 판서(判書) 등을 지냈다. 초명은 권도(權蹈)이며, 자는 중의(仲義) 또는 중안(仲安)이고, 호는 지재(止齋)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의정부(議政府) 찬성사(贊成事)를 지낸 개국공신(開國功臣) 권근(權近)이며, 어머니 경주 이씨(慶州李氏)는 우정언(右正言)이존오(李存吾)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검교정승(檢校政丞)권희(權僖)이고, 증조할아버지는 검교시중(檢校侍中)권고(權皐)이다.
태종 시대 활동
개국공신 권근의 아들로 경승부(敬承府) 주부(主簿)에 보직되었다가 이후 여러 번 관직을 옮겨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이 되었으나,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의 뜻을 거슬러 파면되었다.(『세종실록』 27년 4월 16일) 그러다가 1414년(태종 14) 친시(親試)에서 제1등으로 뽑혀 사간원(司諫院) 우헌납(右獻納)에 임명되었고, 병조 정랑과 예문관(藝文館) 응교(應敎)를 거쳐 1416년(태종 16) 성균관(成均館) 사예(司藝)에 임명되었다.(『태종실록』 14년 7월 19일),(『세종실록』 27년 4월 16일),[『국조방목(國朝榜目)』]
1417년(태종 17) 성균관 사예로서 상서(上書)하여 맏아들을 적장자로 삼는 종자(宗子)의 법을 행하도록 청하였으나, 중도에 정지되었다.(『태종실록』 17년 1월 12일) 이듬해인 1418년(태종 18)에는 의정부(議政府) 사인(舍人)이 되었는데, 이때 사헌부에서 권제가 우의정박은(朴訔)의 말을 계달(啓達)하는 데 착오가 있었다고 탄핵하여 파면되었다.(『태종실록』 18년 4월 14일) 일찍이 박은은 신효창(申孝昌)이 태조(太祖)를 등에 업고 동북면(東北面)에서 병란(兵亂)을 일으키려 하였다는 이유로 처벌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때 박은은 신효창을 당시 병란에 동참하였던 박만(朴蔓)과 같게 처벌할 것을 건의하였는데, 권도는 박은이 신효창의 죄를 청하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고 변명하였기 때문이다.(『태종실록』 18년 4월 6일) 이 일로 인해 권제는 의정부 사인에서 물러났다가 태종이 세종을 세자로 삼자 전사소윤(典祀少尹)세자좌문학(世子左文學)으로 임명되었다.(『세종실록』 27년 4월 16일)
세종 시대 활동
1419년(세종 1) 사헌부 집의(執義)에 임명되고, 사은사(謝恩使)경녕군(敬寧君)이비(李裶)를 좇아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북경(北京)에 갔다가 돌아와서 승정원(承政院) 동부대언(同副代言)을 거쳐 승정원 좌대언(左代言)이 되었다. 이후 1423년(세종 5)에는 어머니 상(喪)을 당하였는데, 복(服)을 마치자 집현전(集賢殿) 부제학(副提學)을 거쳐 예조 참판(參判)에 임명되었고, 여름에는 사헌부 대사헌으로 옮겼다. 이어 겨울에는 함길도관찰사(咸吉道觀察使)가 되어 나갔으나, 전 함길도관찰사이종선(李種善)으로부터 호부(虎符)를 전달받는 과정에서 임금을 속인 일이 있어 파직당하고 진천(鎭川)에 유배되었다.(『세종실록』 8년 11월 17일)
1430년(세종 12) 경창부윤(慶昌府尹)에 임명되었으나, 환관 이촌(李忖)의 아내인 여승[尼] 묘안(妙安)의 집을 빼앗은 사건으로 배천(白川)에 유배되었다.(『세종실록』 12년 6월 5일) 1432년(세종 14) 봄에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가 되었다가 가을에 병으로 사직하였고, 1433년(세종 15) 봄 다시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으며, 1435년(세종 17)에는 이조 판서가 되었다.(『세종실록』 27년 4월 16일) 이로부터 문한(文翰)을 맡고, 1437년(세종 19) 왕명에 따라 『고려사(高麗史)』를 편수하였다.(『세종실록』 24년 8월 12일) 이후 예조 판서로 옮겼다가 1438년(세종 20) 계품사(計稟使)혜령군(惠寧君)이정(李𧘿)의 부사(副使)로 북경에 가서 칙서(勅書)를 받들고 돌아온 후 예문관 대제학(大提學)과 중추원사(中樞院事)로 옮겼다.(『세종실록』 27년 4월 16일) 1439년(세종 21) 겨울 조카인 권담(權聃)이 자신의 전처인 박씨(朴氏)와 간통하여 낳은 딸 권영금(權英今)을 위해 거짓으로 문서를 만들어 재산을 분배하는 과정에 관여한 것이 드러나 원주(原州)로 폄출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와서 그대로 『고려사』를 편수하였다.(『세종실록』 21년 11월 22일)
1440년(세종 22) 봄 중추원(中樞院) 동지사(同知事)가 되었다. 1443년(세종 25)에는 의정부 좌참찬 겸 판이조사(判吏曹事)에 임명되었고, 1445년(세종 27)에는 왕명을 받아 정인지(鄭麟趾), 안지(安止)등과 함께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었다.(『세종실록』 27년 4월 5일) 이후 우찬성으로 승진하였다가 그해 3월 종병(瘇病)을 앓았는데, 임금이 의원을 통해 약을 보내고, 또 날마다 내의(內醫)를 보내 문병하였다. 그럼에도 병이 위독해지자 특별히 맏아들 권지(權摯)에게 한 계급을 뛰어 벼슬을 제수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세상을 떠나니, 당시 권제의 나이가 59세였다.(『세종실록』 27년 4월 16일) 그의 문집으로는 『지재집(止齋集)』이 있으며, 그밖에 『역대세년가(歷代世年歌)』, 『영가연괴집(永嘉連魁集)』 등의 저술을 남겼다.
하지만 권제 사후 『고려사』를 개찬하는 과정에서, 권제가 안지와 더불어 그 내용을 마음대로 삭감하거나 남의 청촉(請囑)을 받거나 혹은 자기에게 관계되는 긴요한 절목(節目)에서 그 사실을 모두 삭제한 일이 드러나 문제가 되었다. 특히 그는 자기 선조(先祖)의 행적을 왜곡한 사실로 비난받았는데, 아버지 권근이 명나라 황제의 성지(聖旨)를 사사로이 열어본 일을 왜곡하여 서술하였으며, 사초(史草)에 권제의 선조인 권부(權溥)와 권준(權準), 권고 등의 행실이 낮게 서술되어 있었는데도 이를 기록하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그는 일찍이 『고려실록(高麗實錄)』을 수찬할 때 그 세계(世系)가 미상(未詳)으로 되어 있는 자신의 선조권수평(權守平)을 임의로 고려 태조(太祖)의 공신인 권행(權幸)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권제는 『고려사』의 개찬 과정에서 그 내용을 고의로 누락시키거나, 자기 선조들의 공적을 의도적으로 높게 서술하였다. 이로 인해 권제는 고신(告身)과 시호(諡號)를 추탈(追奪)당하였다.(『세종실록』 31년 2월 22일) 이후 단종(端宗) 대에 권제의 아들인 권남(權擥)이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적극 참여하여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에 책록되면서, 당시 수양대군(首陽大君)이던 세조(世祖)로부터 고신을 돌려받았다.(『단종실록』 1년 11월 22일)
성품과 일화
권제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총명하고 학문이 넓으며, 말을 잘해 시사(時事)에 대하여 말하기를 좋아하였다. 일찍이 권제는 젊었을 때 네 명의 벗과 함께 경기도 금천현(衿川縣)의 안양사(安養寺)에서 수학하였다. 그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자 권제는 벗에게 시를 보내 “고인(故人)은 아직도 예전대로 삼옷 입고서 용문(龍門) 약속 어김을 일찍 웃었다. 삼성산 신령이 응당 경사로 여기리. 네 가지 단계(丹桂)가 아침볕에 빛난다.”고 하였다. 함께 수학한 네 벗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자, 이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지은 것이다.
그러나 기첩(妓妾)에게 마음을 뺏겨 처자 대접하기를 매우 박하게 하는 바람에 가도(家道)가 바르지 못하였으므로, 세상에서 이를 좋지 않게 여겼다. 그의 딸이 일찍이 그의 첩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권제가 딸을 발로 차서 죽인 일도 있었다. 하지만 이때 권제는 『고려사』 편찬의 중임을 맡고 있었으므로 그의 죄는 불문에 부쳐졌다.(『세종실록』 27년 4월 16일)
묘소와 후손
권제의 묘는 충청북도 음성군 생극면 방축리에 있다.
부인 경주 이씨(慶州李氏)는 이휴(李携)의 딸인데, 6남 1녀를 두었다. 1남 권지는 환관 이촌(李忖)에게 입양되었고, 2남 권남은 이원(李原)의 딸과 결혼하였으며, 수양대군과 함께 『역대병요(歷代兵要)』를 편찬하고, 계유정난에 참여하여 정난공신 1등에 책록되었다. 3남 권반(權攀)은 유담(柳譚)의 딸과 결혼하였고, 계유정난 이후 수충경절좌익공신(輸忠勁節佐翼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4남 권마(權摩)는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제수되었으며, 5남 권혈(權挈)은 단종(端宗) 대에 장흥고(長興庫) 직장(直長)을 역임하였다. 6남 권경(權擎)은 계유정난 당시 황보 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등을 살해하는 데 협력한 공으로 정난공신(靖難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1녀는 계유정난에 참여하여 정난공신 3등에 책록된 한명진(韓明溍)과 혼인하였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보감(國朝寶鑑)』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신은제, 「『高麗史』 편찬 후 고려에 대한 기억」, 『한국중세사연구』23,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