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위현(軍威縣)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신라시대에 기원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현재 경상북도 군위군 군위읍 지역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던 조선시대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군위현(軍威縣)은 신라시대의 노동멱현(奴同覓縣)에서 기원했으며, 신라 경덕왕 때군위현으로 개명되면서 숭선군(崇善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고려시대에도 그대로 군위현이었으며, 상주(尙州)와 일선군(一善郡)의 속현(屬縣)으로 편성되었다. 1390년(고려 공양왕 2)에 지방관으로 감무(監務)가 파견되었으며, 감무는 조선시대 1413년(태종 13)부터 현감(縣監)으로 개칭되었다. 조선시대에도 계속 군위현으로 불리다가 1895년(고종 32)에 군위군으로 승격하였다. 현재 경상북도 군위군으로 계승되고 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군위현은 신라시대에 노동멱현이었다가 경덕왕 때 군위현으로 개명하였으며, 신라 9주(九州) 중 상주에 속했던 숭선군(현: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의 영현으로 편성되었다. 고려시대에도 그대로 군위현이었으며, 1018년(고려 현종 9)에 상주의 속현이 되었다가, 1143년(고려 인종 21)에 일선군(현: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의 속현이 되었다. 1390년부터 감무를 파견하였으며, 효령현(孝靈縣)을 겸임하도록 하고 합병하였다. 조선에 들어와서는 1413년에 감무가 현감으로 개칭되었다.

조직 및 역할

신라시대에 군위현은 숭선군의 영현으로 소수(少守) 혹은 현령(縣令)이 파견되었다. 한편 고려시대에 군위현은 상주, 이후에는 일선에 소속된 속현이었다. 속현인 군위현에는 중앙에서 별도의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았으며, 상주나 일선에 파견된 지방관이 군위현을 관할하였다. 당시 군위현에는 별도로 읍사(邑司)가 설치되어 토착의 향리(鄕吏)들이 읍사에서 자치적으로 지방 행정업무를 수행하였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서 향리의 권한과 지위는 약화되고, 현감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되었다. 군위현에는 고려말기인 1390년부터 감무가 지방관으로 파견되었으며, 조선시대 1413년에 감무는 현감으로 개칭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과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군위현에는 종6품의 현감과 종9품의 훈도(訓導)가 파견되었다. 18세기의 지리서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 의하면 군위에는 6품의 문관(文官) 혹은 음관(蔭官)이 현감으로 임명되며, 좌수(座首) 1명, 별감(別監) 2명, 군관(軍官) 30명, 인리(人吏) 65명, 지인(知印) 28명, 사령(使令) 23명, 관노(官奴) 24명, 관비(官婢) 17명이 편성되었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도 종6품의 현감이 임명된다는 내용이 있다.

변천

조선시대 내내 군위현의 연혁은 거의 변동이 없다. 단 1895년(고종 32)에 전국을 23부로 나누었을 때 군위군(軍威郡)이 되어 대구부(大邱府)의 관할에 속했다(『고종실록』 32년 5월 26일). 1896년(고종 33)에 13도제가 실시되면서 군위군은 경상북도 관할의 4등군으로 편제되었다. 이후 현재까지 군위군은 이어진다. 조선시대에 군위현의 관아가 위치했던 곳은 현재 경상북도 군위군 군위읍 동부리·서부리 일원이다.

참고문헌

  • 『삼국사기(三國史記)』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 『대동지지(大東地志)』
  • 『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