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기대신(軍機大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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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옹정제대 설치한 군기처의 관직 중의 하나.

개설

군기대신은 청나라 옹정제(雍正帝)대 설치한 군사·정무의 최고 기간 중앙통치기구인 군기처(軍機處)를 구성하는 관직의 하나였다. 옹정제는 새로운 통치기구인 군기처를 설립해 소수의 관리들을 운용하여 행정의 동맥인 문서를 장악하고 동시에 정보를 독점하여 정국을 주도하고자 하였다. 옹정제는 의정왕대신(議政王大臣)들에 대한 견제를 염두에 두고 실무에 익숙한 군기대신을 두었다. 군기대신은 황제가 직접 임명하였으며, 주접(奏摺)의 처리, 유지의 작성, 군무의 처리 등에 참여하였다.

군기대신이 군사적인 일에 관여하였다는 사실은 1786년 겨울에 복건(福建) 지역의 임상문(林爽文)이라는 이가 무리를 모아 모반을 하자, 군기대신해난찰(海蘭察)로 광동(廣東)·절강(浙江)·복건·사천(泗川)·호남(湖南)·호북성(湖北省) 등의 군사 100,000 이상을 징발하고 여러 차례 전쟁에 참여한 100여 명을 뽑아 이를 정벌하게 한 사실에서도 알 수가 있었다(『정조실록』 11년 11월 23일).

정조대의 문신 이곤(李坤)이 청나라 연행에서 견문한 바를 기록한 『연행기사(燕行記事)』에 들어 있는 『문견잡기(聞見雜記)』에는 군기대신에 대하여 대략 다음과 같이 적었다. 모두 청나라 사람인데 곧 송나라의 추밀사(樞密使)였다. 대궐 가운데에 높은 누각을 세우고, 기밀에 대한 일이 있으면 황제가 반드시 군기대신을 불러 함께 이 누각에 올라 좌우를 다 물리치고 사다리도 걷어치우고 여러 날을 함께 자고 거처하며 충분히 계획한 뒤에 비로소 나와서 거행하였다. 그러므로 그 계획과 시책은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없다고 한다고 서술하였다. 건륭제(乾隆帝)대는 그 업무가 군사적인 것에서 발전하여 일반 정무로까지 참여하는 분야가 확대되었다.

담당 직무

군기대신이 담당하는 임무는 공적이거나 사적인 것을 구분하지 않았는데, 비밀을 보장하여 황제에게 직접 상주하는 형식의 문서제도인 주접제도에 관여하였으며, 군대 지휘관의 임명과 직무를 바꾸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다만 지휘관의 인사이동에 대한 논의는 전국 전 지역의 군영을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었는데, 옹정(雍正) 연간의 군기대신이 관여하는 인사이동은 서북양로(西北兩路)의 군영에 한정되었다.

군기대신의 업무 범위는 황제의 지시에 의해서만 결정되었다. 황제의 지시가 있는 주접에 대해서만 열람이 허용되었고 황제가 설정한 범위 안에서만 활동이 가능하였다. 군기대신의 모든 활동은 황제의 통제 하에서만 가능하였으므로 군기처는 명목상의 중추기관일 뿐 그 영향력이나 활동 범위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군기대신들은 황제의 근신으로서 황제 가까이에서 황제가 부를 때마다 입직하여 지시를 받았다. 군기대신들은 매일 새벽 3시에서 5시에 해당하는 인시에 입직하였고 오전 7시에서 9시에 해당하는 진시에는 황제를 접견하였다. 중요한 일이 생기면 접견 시간을 앞당기기도 하였다. 황제를 보좌하는 비서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활동의 제약 때문에 군기처는 단순히 황제의 지시사항을 문서화하는 작업에만 활용되는 비서기구라는 평가도 받았다.

옹정제는 군기대신들이 황제의 지시에 따라서 주접을 열람하고 이에 대하여 의견을 제시하였을 때, 이들의 의견을 대체적으로 긍정적으로 수용하였다. 이는 황제가 모든 문제에 대해서 대안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군기대신들의 능력과 경험을 빌리고자 하는 것으로, 이것을 통해서 군기대신들을 자문대신으로 활용하고자 한 옹정제의 의도와 함께 이들에 대한 옹정제의 신임과 이들의 영향력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다. 옹정 연간 군기대신들은 황제가 설정한 범위 안의 일을 처리하는 등 활동 범위에 제한이 있었으나, 그들이 처리하는 일의 성격으로 미루어 볼 때 그들의 견해가 황제가 정책을 결정하는 데 어느 정도 작용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내각은 일상적인 일을 담당하였고 군기처는 기밀사항을 처리하였기 때문에 내각과의 관계에서도 상대적으로 중요한 지위를 점하였다.

그러나 군기대신이 의견 제시를 통해서 황제의 결정에 영향력을 갖는다고 해도 황제의 견해에 대해서 거부권을 행사한다거나 황제의 독재적인 권력 행사를 견제할 수 있는 어떠한 권한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옹정 연간 군기처와 군기대신은 황제의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기구일 뿐 독립적인 노선을 가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군기대신으로 임명된 후에는 명·청대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많은 권력을 소유하였다고 할 수 있다. 전 시대의 재상과 같이 황제의 일방적인 권력 행사를 견제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변천

군기처는 건륭제시대에 체제가 정비되었는데, 1744년부터는 영반군기대신(領班軍機大臣)이 등장하였다.

참고문헌

  • 『연행기사(燕行記事)』
  • 김인규, 「청 옹정제의 통치기반과 통치철학」, 『동양문화연구』 13, 2013.
  • 송미령, 「건륭 초 구세력 배제와 군기처 정비」, 『명청사연구』 18, 2003.
  • 송미령, 「옹정 연간(1723~1735) 군기처의 성격-군기대신 분석을 중심으로-」, 『이대사원』 29, 1996.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