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계학조사(軍械學造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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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고종 13) 강화도조약 이후 국방력 강화책으로 진행하던 신무기 제조법의 학습을 총칭하는 말.

개설

개항 이후 조선 정부는 국내외의 정세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며 서구의 신문물 도입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군국의 중심인 신식 무기의 수입과 그 제조법을 배우기 위한 기구의 신설에 노력하였다. 이에 따라 1879년(고종 16)에 추진된 신무기 제조법의 학습을 군계학조사(軍械學造事)라고 하였다. 조선은 청나라에 무기의 제조, 무기의 구매, 병사의 훈련 등을 요구하였다(『고종실록』 18년 2월 4일). 7월에는 조선 정부가 군계학조사를 위해 변원규(卞元圭)를 청나라에 파견하였다. 조선 정부는 무비자강(武備自强)을 위해 청나라에 유학생 파견을 추진하였다. 변원규는 1880년(고종 17)에 별재자관(別賫咨官)으로 청나라에 파견되어 리홍장(李鴻章)과 4개조로 된 조선국원변래학제조조련장정(朝鮮國員辨來學製造操練章程)을 체결하여 무기 제조와 학습을 위한 유학생 파견의 근거를 마련하였다. 그는 1881년(고종 18)에 영선사(領選使)김윤식(金允植)의 별견당상(別遣堂上)으로 군기 제조 학습을 위해 유학생들을 인솔하고 청나라 천진에 파견되었다. 이들을 기기학도(機器學徒)라고 칭하였다.

영선사김윤식은 청나라에서 대표적인 무기 제조소인 천진기기국(天津機器局)을 시찰하였으며, 천진기기국 동국총판(東局總辦)반준덕(潘駿德)의 권유로 유학생들에게 화약·탄환 제조법, 전기·화학·제련·기계학과 외국어를 배우게 했다. 김윤식은 천진에서 군계학조사의 성과를 지켜보면서 학습자의 대다수가 3개월도 못 되어 귀국하자 조선에 별도의 기관을 설치하여 무기 제조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그는 유학생의 귀국과 함께 청나라의 무기 기술자도 초빙하여 청나라식 무기 공장 설립을 시도하였다. 이때 설치한 것이 기기국(機器局)이다. 기기국은 1883년(고종 20) 5월에 근대 무기의 제조를 담당할 기구로 설치하였다. 물론 1881년 1월에 신설한 통리기무아문에 군물사(軍物司), 기계사(機械司) 등을 설치한 바 있었으나 본격적인 무기 제조는 기기국에서 진행하였다. 기기국은 1884년(고종 21) 8월에 조선시대 무기 제작을 관장하던 군기시(軍器寺)를 흡수하여 무기 제조를 대표하는 기구가 되었다. 기기국은 정부의 어느 기관에도 예속되지 않은 독립 기관이었다. 운영 자금은 공조(貢條)에서 책정하였다.

조선 정부는 무기 제조에 박차를 가하면서도 청나라의 상해초상국(上海招商局)을 통해 근대 기계 공장 설치에 필요한 동모(銅帽)와 강수제조기(䃨水製造器) 등 과학기계와 과학기술 서적을 들여왔다. 이때 청나라 사람인 광무국(鑛務局) 총판당경성(唐景星), 상무관진수당(陳樹棠), 독일인 묄렌도르프(Paul George von Möllendorff) 등도 초빙하였다. 이후 1883년에 군국아문에서 무기 제조를 위한 기기창(機器廠) 설립을 준비하여 양향청(糧餉廳)에 건설하였다. 기기창은 1883년 8월 22일에 착공하여 1887년(고종 24) 10월 29일에 준공하였다(『고종실록』 24년 10월 29일). 당시 기기창에서는 증기 기관에 의한 동모 생산과 소총 제작이 가능했다. 기기창은 1895년(고종 32)에 포공국(砲工局)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러일전쟁 이후인 1905년(광무 9)에는 군기창(軍器廠)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군계학조사는 고종이 근대적 독립 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방법으로 무기 제조를 추진하던 과정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개항 이후 유럽식 군대의 무기를 도입하기 위해 청나라의 사례를 참조하려고 했으며 그 결과 무기 제조법을 익히기 위해 유학생을 파견하였다. 이 유학생들이 귀국하면서 국내에서도 근대적인 무기 제조를 시도할 수 있었다. 고종은 무기 제조법을 익힐 유학생의 파견을 통리아문(統理衙門)에서 담당하도록 하여 정부 차원에서 일을 주관하도록 하였다(『고종실록』 18년 2월 4일).

내용

무기 제조를 위해 청나라 천진에 파견한 학도는 69명이었다. 이들은 천진에 도착하여 병장기를 만들던 천진기기국의 2개 국(局)에 나뉘어 배속되었다(『고종실록』 18년 2월 26일), (『고종실록』 18년 9월 26일). 영선사 일행은 1881년 9월 26일 서울을 출발하여 육로로 11월 17일 북경을 거쳐 천진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학도들의 학습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처음부터 한계가 있었다. 학도들은 천진기기국에 배속되어 군기 지식, 자연과학, 외국어 등을 학습하여 근대적 문물 습득에 진전을 보였다. 그러나 군사적 지식 습득을 위한 수사학당(水師學堂)과 수뢰학당(水雷學堂)에는 소수만이 입당하여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또한 유학생의 반수가 신병과 개인 사정으로 귀국했으므로 성공적인 학습이 되지 못했다. 더욱이 조선 정부가 지속적으로 유학비를 지원하지 못하여 장기적인 체류가 보장되지 않았다(『고종실록』 19년 2월 17일). 특히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모든 학습은 중단되었고 학도들도 귀국하였다.

변천

학도들이 귀국하면서 가져온 서구식 기계와 과학기술 서적은 국내의 무기 제조 기술이 발전하는 기반이 되었다. 또한 1883년에 국내 최초의 근대 병기 공장인 기기창과 번사창(飜沙廠)을 설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국사편찬위원회, 1967.
  • 이태진, 『고종시대의 재조명』, 태학사, 2000.
  • 임경석·김영수·이항준, 『한국근대외교사전』, 성균관대학교, 2012.
  • 권석봉, 「영선사행(領選使行)에 대한 일고찰:군계학조사(軍械學造事)를 중심으로」, 『역사학보』 17·18, 1962.
  • 김정기, 「1880년대 기기국·기기창의 설치」, 『한국학보』 4권 1호 ,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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