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원(國史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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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의 내삼원에 소속된 내국사원.

개설

내국사원(內國史院, [suduri ejere yamun])은 내비서원(內秘書院, [narhūn bithei yamun)·내홍문원(內弘文院, [kooli selgiyen yamun])과 함께 내삼원(內三院, [bithei ilan yamun])을 구성한 기관으로, 황제의 기거(起居)와 조령(詔令)을 기록하고 사서와 실록의 편찬 업무를 담당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내국사원은 1636년 3월 기존의 문관(文館, [bithei yamun])을 기반으로 새로이 내삼원을 편성하는 과정에서 설립되었다. 설립 당시 이 기관은 조칙(詔勅) 및 황제의 일상과 군사·행정 업무 등을 기록하고 어서(御書)를 보관하는 일, 각종 의식에서의 문서를 낭독하는 일, 각종 문서를 수집하여 역사서로 편찬하는 일 등을 담당하도록 명시되었다.

조직 및 역할

처음에는 육부의 제도에 의거하여 승정(承政, [aliha amban])을 장관으로 설치하였으나, 1636년 5월 대학사(大學士, [bithei da]) 개정하고 품급을 올려 주었으며 그 휘하에는 학사(學士, [ashan i da])·거인(擧人, [tukiyehe niyalma])·수재(秀才 또는 생원(生員), [šusai])를 설치하였다.

이 기관은 군사·행정 등에 관한 주요 업무 및 황제의 결정 등을 기록하고, 각종 의식에서의 문서를 낭독하며, 황제의 친필부터 외국과 주고받은 문서에 이르기까지 각종 기록 자료들을 수집하여 역사서로 편찬하는 일 등을 전담하였다. 이는 명조에서 운영한 한림원(翰林院)의 기능과 상당히 흡사한 것이었으며, 실제로 1645년에는 내삼원에 한림원을 통합하기도 하였다.

변천

1645년에는 한림원이 내삼원에 편입되면서 내한림국사원(內翰林國史院)이라는 이름으로 재편되었다. 이는 효종대 인평대군(麟坪大君)이요(李㴭)의 사행이 금령을 어기고 화약을 밀매한 사건을 심사하기 위하여 조선을 방문하였던 액색흑(額色黑)의 직함 중 하나인 내한림국사원(內翰林國史院) 태학사(太學士)에서도 확인되었다(『효종실록』 8년 3월 28일). 이후 1658년 내삼원이 내각(內閣)으로 개편되는 과정에서 사라졌다.

참고문헌

  • 『만문노당(滿文老檔)』
  • 류소맹 저, 이훈·이선애·김선민 역, 『여진 부락에서 만주 국가로』, 푸른역사, 2013.
  • 송미령, 「청초 정책 결정기구 속의 만주인」, 『만주연구』 14,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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