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당(國師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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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종교의 신당의 하나.

내용

국사당(國師堂)은 언제부터 건립되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규보(李奎報)가 국사대왕에게 비를 비는 제문이 전하는 것으로 미루어, 고려시대에는 이미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서울을 비롯하여, 함경도의 단천·종성·온성·영흥, 경기도의 개성·연천, 강원도의 홍천·평강, 충청도의 청안(淸安)과 경상도의 화령(化寧)·거제 등지에서 그 존재가 확인되는 점으로 미루어 분포는 전국적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현재는 중서부 해안, 도서 지방에서 마을 공동체 신앙으로만 남아 있을 뿐 인멸되고 있는 상태이다.

조선시대 국사당 의례는 민간의 행사로만 그치지 않았다. 서울 국사당은 전사청(典祀廳)에서 관계했으며, 개성 송악산의 국사당은 국가 제사 가운데 중사(中祀)에 등재되어, 국가에서 봄·가을로 관리가 제사했고, 당지기도 4명이나 배치되어 있었다. 또 경상도 거제현의 국사당은 수군처치사(水軍處置使)가 제사했으며, 청안의 국사당제는 현의 수리(首吏)가 주도했다. 충청도 청안에서는 3년마다 한 번씩 3월 초에 국사신 부부를 장압산(長鴨山)으로부터 읍내로 모시고 내려와 20일간 굿을 했다고 한다. 또한 가뭄 때와 같은 비상 시기에는 기우제를 지냈다.

그러나 국사당제는 유학자들 사이에서 음사(淫祀)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1566년(명종 21)에 개성의 국사당이 유생들에 의해 파괴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사당 의례는 일부 지역에서 현재까지 민속의례로 남아 있는데, 마을 유지들로 구성된 제관들이 제물을 차려놓고 절을 하는 간단한 동제 형식으로 유지되고 있다.

서울의 국사당은 남산 팔각정 자리에 있던 것을 1925년 일제가 조선신궁을 건립하면서 인왕산 중턱으로 이전하였다. 개성의 국사당은 송악산 위에 있었으며, 그 밖의 국사당도 봉수와 인접한 경우가 많다. 현존하는 국사당들도 산의 높은 곳에 위치한 점으로 미루어, 국사당의 위치는 대개 산 정상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청풍신륵사나 합천해인사 같은 사찰 내에도 국사당(단)이 있는 예가 있다. 국사당의 형태는 그 명칭으로 미루어 당집이 일반적이었겠지만, 현재는 당집 없이 제단과 신수(神樹)로만 이루어진 것도 있다.

국사당에서 모시는 국사신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명이 있다. 예컨대 이규보는 국사가 석가를 받든다고 했고, 『세종실록』에서는 개성 국사신을 법사존자(法師尊者)라 했으며, 지리산 국사신은 성모천왕의 정부로 불상 모습이라 했다. 그런가 하면 서울 국사신은 천제(天帝)의 명으로 목멱산에 내려와 조선을 수호하는 신이란 전승도 있으며, 국사당의 위치가 대부분 산정이란 점에서 천신 계통의 신격이란 견해도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국사신이 원래는 불교와 뒤섞인 민속종교의 신격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서울의 경우 목멱산 국사당이라고 하면서 그곳에는 공민왕·무학 대사·나옹 화상·지공 대사·맹인 신·천연두 신을 모셨을 뿐 국사신은 없다. 또 인왕산으로 옮겨진 지금 역시 태조 이성계를 비롯한 무신도만 있을 뿐 국사신은 없다. 이러한 사실들은 국사신이 어느 시점부터 점차 독립된 성격을 잃어버리고, 다른 신격에 흡수된 결과인 것 같고, 나아가 이것이 국사당 신앙 쇠퇴의 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용례

書啓曰 城隍堂, 月井堂, 開城堂, 大國堂 竝爲儒生所焚爇 國祀堂則 只撤破蓋屋而已(『명종실록』 21년 1월 24일)

참고문헌

  •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점필재집(佔畢齋集)』
  • 『천예록(天倪錄)』
  •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김태곤, 「국사당신앙」, 『한국민간신앙연구』, 집문당, 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