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종직(丘從直)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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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구종직 |
한글표제 | 구종직 |
한자표제 | 丘從直 |
분야 | 인물 |
유형 | 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세종~성종 |
집필자 | 이현숙 |
자 | 정보(正甫) |
봉작 | 좌익원종공신(左翼原從功臣) 3등 |
시호 | 안장(安長)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404년(태종 4) |
사망 | 1477년(성종 8) |
본관 | 평해(平海) |
증조부 | 구천우(丘天雨); 판서(判書) |
조부 | 구춘호(丘春浩) |
부 | 구양선(丘揚善); (증) 우찬성 |
모_외조 | 공씨(孔氏); 공성길(孔成吉)의 딸 |
처_장인 | 정씨(鄭氏); 정수(鄭穗)의 딸→(자녀) 2남 |
자녀 | (1자) 구달손(丘達孫); 예문관 직제학(直提學) (2자) 구숙손(丘夙孫); 이조 좌랑(佐郞)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구종직(丘從直) |
총론
[1404년(태종 4)∼1477년(성종 8) = 74세.] 조선 전기 세종~성종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공조 판서이고, 봉작(封爵)은 좌익원종공신(左翼原從功臣)이며, 시호는 안장(安長)이다. 자(字)는 정보(正甫)이다. 본관은 평해(平海)이다. 아버지는 구양선(丘揚善)이고, 어머니 공씨(孔氏)는 공성길(孔成吉)의 딸이다.
세종 시대 활동
1444년(세종 26) 식년(式年) 문과의 정과(丁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41세였다.[<문과방목>] 바로 성균관 학유(學儒)에 보임되었다.
1447년(세종 29) 영동현감(永同縣監)으로 나갔다.
단종 시대 활동
1455년(단종 3) 사간원 좌헌납(左獻納)에 임명되었다.
세조 시대 활동
1457년(세조 3) 헌납으로서 좌익원종공신(左翼原從功臣) 3등에 녹훈되었고, 이어 낙안군수(樂安郡守)와 고성군수(高城郡守)가 되어 외방으로 나갔다.
1465년(세조 11) 성균관 직강으로 있을 때, 역리강론(易理講論)으로 세조에게 인정을 받아 성균관 사성(司成)으로 발탁되었으며, 친강(親講) 때마다 역리를 논하였다.
1466(세조 12) 공조 참판에 이어 공조 판서가 되었다. 같은 해 등준시(登俊試)에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63세였다.[<문과방목>]
1467년(세조 13) 중추부 첨지사(僉知事)가 되었다.
성종 시대 활동
1469년(성종 즉위) 중추부지사 겸 지경연사(知經筵事)가 되었다.
1471년(성종 2) 경연에서의 언사 때문에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면되었다.
1473년(성종 4) 70세가 되었다고 하여 치사(致仕)를 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1477년(성종 8) 10월 3일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성품과 일화
문장이 뛰어나고 역학과 경학에 밝았다. 구종직이 교서관 정자(正字)로 있을 때, 경회루의 경치가 매우 좋다는 말을 듣고 숙직을 하다가 경회루의 연못가를 산책했다. 이때 우연히 세종과 마주치게 되었는데, 세종은 구종직의 신분과 밤중에 경회루에 나와 있는 까닭을 물은 후에 "경전을 외울 줄 아느냐?"고 물었다. 그가 『춘추』 한 권을 줄줄 암송하자, 감탄한 세종은 이튿날 그를 정9품관인 정자에서 종5품직인 홍문관 부교리에 임명하였다고 한다.
후손
부인 정씨(鄭氏)는 정수(鄭穗)의 딸인데, 슬하에 2남을 두었다. 장남은 예문관 직제학(直提學)구달손(丘達孫)이고, 차남은 이조 좌랑(佐郞)구숙손(丘夙孫)이다.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간재집(艮齋集)』
- 『국조보감(國朝寶鑑)』
- 『눌재집(訥齋集)』
- 『대동기문(大東奇聞)』
- 『대산집(臺山集)』
- 『동야집(東埜集)』
- 『사가집(四佳集)』
- 『석재고(碩齋稿)』
- 『성호사설(星湖僿說)』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용재총화(慵齋叢話)』
- 『추암집(菴集)』
- 『태촌집(泰村集)』
- 『태허정집(太虛亭集)』
- 『해동야언(海東野言)』
- 『홍재전서(弘齋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