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전차첩(口傳差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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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구전(口傳)에 근거하여 참하 무록관이나 권지 분관직 등에 임명할 때 발급한 문서.

개설

조선시대 첩식(帖式) 문서 가운데 관직 임명을 위해 발급한 문서를 차첩(差帖)이라 하였다. 차첩은 중앙 관서인 이조나 병조 등에서 왕의 구전을 받들어 관직에 임명하는 경우와 지방 관서에서 관서의 장(長)이 직권으로 관직에 임명한 경우가 있었다. 구전차첩(口傳差帖)은 바로 전자를 가리킨다.

제정 경위 및 목적

『고려사』에 따르면 왕의 구전으로 관직에 임명한 제도는 1319년(고려 충숙왕 6)에 이창(李敞)을 당후관에 임명한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원칙적으로 관원의 임명은 인사를 담당한 관서에서 삼망(三望)을 갖추어 왕의 낙점을 받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구전의 경우는 특수한 사례로서 특정 관직을 임명할 때 전조(銓曹)를 통한 의망 절차를 통하지 않고 승정원을 통한 왕의 구두 지목에 근거하여 임명할 수 있도록 한 제도이다.

내용

조선시대 관원의 임명은 기본적으로 전조라 불린 이조와 병조에서 정사(政事)를 거쳐 해당 결과에 대해 왕의 낙점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 결과는 법전에 규정한 사품이상고신(四品以上告身)과 오품이하고신(五品以下告身)이라는 문서를 작성하여 당사자에게 발급하였다. 그러나 모든 관직에 대해 이상과 같은 절차를 거쳐 임명한 것은 아니었다. 예외적으로 전조의 정사 절차를 거치지 않고, 왕이 구두로 지시를 하거나 이·병조 및 승정원의 입계(入啓)에 따라 신속히 관직에 임명한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경우가 구전에 의한 차정(差定)이고, 이때 발급된 문서를 구전차첩이라 한다.

다만, 육조의 판서, 홍문관 대제학, 외방의 관찰사, 삼사의 관원, 이조의 참판 및 참의, 세자시강원 및 세손강서원의 관원 등 중요한 관원에 대한 구전 임명은 금지하였다. 지금까지 규명된 바에 따르면, 구전을 통한 관직 임명은 왕실과 관련된 일을 맡은 관원이나 국휼을 당해 해당 업무를 담당한 관원, 실직에서 체직시킬 때 임시로 부여한 군직(軍職), 금군장(禁軍將) 등 잠시라도 공석으로 둘 수 없는 관직에 대하여 실행하였다.

실제로 현재까지 남아있는 구전차첩과 『경국대전』, 『전율통보』, 『육전조례』 등에 기재된 구전으로 임명하도록 규정된 관직을 분석해보면, 7~9품의 무록관(無祿官)에 대해서는 구전차첩이 발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구전차첩의 발급자는 주로 이조와 병조였고, 충훈부와 충익부도 있었다. 그 밖에 삼관(三館)으로 지칭되는 성균관, 승문원, 교서관의 권지(權知) 벼슬에 임명할 때도 구전차첩을 사용하였다. 이 경우는 주로 과거에서 새로 합격한 인물을 처음 분관 발령할 때에 해당한다. 구전차첩은 기본적으로 첩식을 준용하여 작성되었다. 이 첩식은 명나라에서 규정한 하첩식(下帖式)을 그대로 수용한 것으로서 『경국대전』「예전(禮典)」에도 반영해놓았다. 구전차첩은 ‘某曹爲差定事’로 시작하여 본문 가운데 왕의 ‘구전’을 받들어 아무개를 무슨 관직에 임명한다는 내용을 적고, 마지막에 ‘合下仰照驗施行 須至帖者 右帖下某 准此’라는 전형적인 첩의 투식을 기재하도록 하였다. 문서의 말미에는 발급하는 연월일을 적고 발급 관서의 관인을 찍은 다음 해당 관서의 당상관이나 당하관이 서명을 함으로써 문서 작성이 완료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구전차첩’이라는 용어와 정확히 일치하는 용례는 3건이 있다. 1473년(성종 4)에 예문관 부제학이극기(李克基)가 상소한 내용 가운데 구전차첩이 없는 자들은 모두 역(役)을 정해주어야 한다는 기사가 있다(『성종실록』 4년 7월 30일). 또 같은 해 기사 가운데 병조에서 왕에게 각 품의 반당(伴儻)들이 반드시 구전을 통해 차첩을 받도록 하고, 만약 구전차첩을 받지 못한 경우에는 해당 도의 관찰사가 역을 부과시키도록 건의한 내용이 있다(『성종실록』 4년 11월 5일). 1475년(성종 6)에 예문관 봉교안팽명(安彭命)이 상소한 내용 가운데서도 구전차첩이 없는 자들에게 역을 부과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성종실록』 6년 5월 12일). 당시 왕명에 의해 관직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지역 사회의 권세에 의탁하여 역을 지지 않으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러한 건의가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그 밖에 직접적으로 ‘구전차첩’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은 아니지만, 맥락상 구전으로 임명한 사례를 가리키는 ‘구전’의 용례는 무수히 많다.

변천

현재까지 실물로 확인된 구전차첩은 1400년대에 발급된 사례부터 조선후기까지 골고루 분포하고 있다. 다만, 구전으로 임명하는 제도의 변화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면밀한 검토가 진행되지 못하였고, 법전에 기재된 구전 차정 대상 관직에 대한 비교나 서명 방식의 변화 정도만 관찰되었다. 처음에는 구전차첩을 발급하는 관서의 당상관과 당하관이 함께 문서에 서명하다가 1700년대 이후부터는 당상관 1인만 서명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전율통보(典律通補)』
  • 최승희, 증보판 『韓國古文書硏究』, 지식산업사, 1989.
  • 송철호, 「조선시대 帖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8.
  • 송철호, 「조선 시대 差帖에 관한 연구 : 17세기 이후의 口傳에 관한 差帖을 중심으로」, 『고문서연구』 35, 2009.
  • 유지영, 「朝鮮時代 任命文書 硏究」,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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