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성부(龜城府)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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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구성부 |
한글표제 | 구성부 |
한자표제 | 龜城府 |
관련어 | 만년군(萬年郡), 구주(龜州) |
분야 | 정치/행정/관청 |
유형 | 집단·기구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고려~조선 |
왕대 | 고려~조선 |
집필자 | 이상배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구성부(龜城府)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조실록』 10년 2월 21일 |
조선시대 평안도 구성부 지역을 관할하던 관청이자 행정구역.
개설
구성부(龜城府)는 고려시대에 구주대첩(龜州大捷)이 벌어진 곳으로 지형상 군사 전략적 요충지에 해당하여 조선시대 세조 때 도호부로 승격하였다. 1895년(고종 32)에 의주부 구성군이 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구성부는 고려시대에 서희(徐熙)가 강동6주(江東六州)를 개척할 때 구주(龜州)로 설치되었으며, 거란의 3차 침입을 막아 낸 강감찬(姜邯贊)의 구주대첩이 벌어진 곳이다. 조선이 건국한 후 1455년(세조 1)에 구성군으로 설립되어 종4품의 지군사(知郡事)를 두어 관할하다가 1464년(세조 10)에 도호부로 승격하여 종3품의 도호부사를 두었다. 조선 초기 『경국대전』이 편찬된 당시에는 평안도에 모두 6곳의 도호부가 존재했으나 변방의 국방 강화 필요성이 증대됨에 따라 『속대전』이 편찬될 때는 14곳으로 증대되었다. 도호부는 읍격(邑格)상 군수와 목사의 중간에 해당하는 것으로 고려시대에는 군사적 성격이 강하였으나, 조선시대는 일반 행정기구로 변화하여 전국에 설치되었으며 후기로 갈수록 그 수가 증대되었다. 조선시대에 평양에서 의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였고, 국방상 긴요한 장소로 인식하여 진(鎭)을 설치하고 세조 때 도호부로 승격하였다.
조직 및 역할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구성부에 도호부사와 교수 각 1인을 두었으나 이후에 교수가 폐지되었다. 종6품의 교수는 지방에서 유교 교육을 담당했던 교관이다. 조선후기에는 독진(獨鎭)으로 도호부사가 수성장을 겸하였다. 조선후기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에 의하면 구성부 소속 관원으로는 좌수 1명, 별감 3명, 군관 4명, 민병중군 1명, 교련관 4명, 기고관 4명, 천총 3명, 파총 6명, 초관 33명, 봉수별장 2명, 수성중군 1명, 난후별장(欄後別將) 1명, 기패관 20명, 아전 37명, 통인(通引) 10명, 사령 14명, 군뢰(軍牢) 15명, 관노 53명, 관비 33명이 있었다.
변천
구성부는 고려시대에 만년군(萬年郡)으로 불리다가 993년(고려 성종 12)에 거란의 침략 때 서희의 담판으로 강동6주를 고려의 영토로 확보하고, 이듬해에 이곳을 관할하기 위해 구주를 설치하였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거란의 3차 침입을 강감찬이 이곳에서 물리쳐 대승을 거두어 구주대첩이라 부른다. 이후 삭주(朔州)에 합해졌다가 다시 정주(定州)에 소속되었다. 조선이 건국한 이후 1455년에 옛 구주가 국방의 요충지임에도 정주와 멀리 떨어져 있어 행정구역을 나누어 새로 구성군을 설치하였다. 1457년(세조 3)에는 곽산(郭山)의 석현(石峴)과 정주의 방아현(防阿峴)·천현(泉峴), 외서양(外西陽) 상사기소(上沙器所)·하사기소(下沙器所) 등지와 수천(隨川)의 안의리(安義里)를 분할하여 구성군에 속하게 하였다. 1464년에 도호부로 승격하였다가(『세조실록』 10년 2월 21일) 다시 군으로 삼았으며, 1466년(세조 12)에 한명회(韓明澮)의 건의에 따라 다시 도호부로 승격하였다. 1484년(성종 15)에는 여연(閭延)·무창(茂昌)·자성(慈城) 등의 고을을 폐지하고 그 고을에 살던 백성을 구성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1895년에 지방제도를 개편할 때 의주부 구성군이 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여지도서(輿地圖書)』
- 차문섭, 『조선시대 군제연구』, 단국대학교출판부, 1973.
- 이존희, 「조선초 지방통치체제의 정비와 계수관」, 『동국사학』15·16 합집,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