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비보(仇非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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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평안도 자성군에 설치되었던 군사시설 보(堡).

개설

구비보가 설치된 자성군(慈城郡)은 폐사군(廢四郡) 지역으로, 세종대에 서북 방면의 여진족을 막기 위해 압록강 상류에 설치한 여연(閭延)·자성(慈城)·무창(茂昌)·우예(虞芮) 등 4개 군(郡)을 말한다. 사군(四郡) 지역은 단종 시기에 여연(閭延)·무창(茂昌)·우예(虞芮) 등 3개 군이 폐지되고, 1459년(세조 5) 자성군마저 혁파되면서 행정적 기능을 상실하였다. 그러나 구비보는 군사적 요충지라는 이유로 이후 복구되어 강계부 관할로 운영되었다.

위치 및 용도

구비보는 평안도 강계부 북쪽의 압록강 변에 위치하였다. 본래 폐사군 중 하나인 자성군에 소속되었지만, 사군이 폐지되면서 강계부에서 관리하였다. 강계부는 조선후기에 별도로 방어영이 설치될 만큼 압록강 국경 방어의 요충지였다. 구비보는 강계부에서 가장 큰 진보였던 만포진으로부터 압록강을 따라 상류 방향으로 상토진(上土鎭)과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였다. 또한 옛 자성군 읍치에서 북쪽으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였다. 구비보는 삼강하구비(三江下仇非), 삼강중구비(三江中仇非), 삼강상구비(三江上仇非) 등으로 지역이 구분되어 있었다.

구비보의 역할은 외적의 방어와 감시였다. 평안도의 방어체제는 기본적으로 순(巡)·병영(兵營)―주진관(主鎭管)·독진(獨鎭)―진보(鎭堡)―파수(把守)로 이어지는 구조였다. 여기에 지휘체계가 미치기 어렵거나 주요한 군사적 요충지에는 추가적으로 방어영(防禦營)을 설치하였다. 또한 평안도에는 다른 지역에 비해서 독진(獨鎭)이 많이 편성되어 있었는데, 이는 적의 침입 경로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압록강 변을 모두 독립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조치였다. 구비보와 같은 진보는 평안도 최전방과 내지의 요충지에서 실질적인 방어를 담당하는 군사시설이었다. 진보는 적 침입 시 일차적인 방어처로서 각지에 있는 봉수(烽燧)와 파수(把守)를 관리하였다.

변천 및 현황

구비보는 조선전기에는 폐사군 지역에 소속된 작은 군사시설이었기 때문에 크게 주목받지 못하였다. 병자호란 이후 청국의 감시로 인해 강변 방어체제가 무너지면서 구비보 역시 방치된 상황이었다. 17세기 후반 조정에서 이른바 청의 ‘영고탑(寧古塔) 회귀설’이 제기되면서 청이 만약 영고탑으로 돌아올 경우 가장 가까운 국경지대가 되는 강계 북부 지역에 대한 방비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 지역은 현종대부터 시작하여 숙종 즉위 후 본격적으로 군제 복구가 시작되었는데, 구비보도 이 시기 함께 정비된 것으로 보인다. 구비보는 『속대전』에 수록된 진보는 아니었지만, 18세기 이후에도 계속해서 유지되며 군사 임무를 수행하였다. 1793년(정조 17)에는 평안도관찰사이병모(李秉模)의 건의에 따라 삼강(三江)의 구비보까지 개간을 허락하여 사람을 거주하게 하였다(『정조실록』17년 2월 18일).

참고문헌

  • 『속대전(續大典)』
  • 강석화, 「조선후기 평안도지역 압록강변의 방어체제」, 『한국문화』34,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4.
  • 고승희, 「조선후기 평안도지역 도로 방어체제의 정비」, 『한국문화』34, 규장각한국학연구소, 2004.
  • 이철성, 「17세기 평안도 ‘강변 7읍’의 방어체제」, 『한국사학보』13, 고려사학회, 2002.
  • 임성수, 「18세기 평안도 진보 재정의 운영과 변화」, 『한국사학보』46, 고려사학회,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