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희문(光熙門)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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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광희문 |
한글표제 | 광희문 |
한자표제 | 光熙門 |
동의어 | 수구문(水口門) |
관련어 | 동교(東郊), 두모포(豆毛浦), 사소문(四小門), 소덕문(昭德門), 왕십리(往十里), 창의문(彰義門), 홍화문(弘化門) |
분야 | 왕실/왕실건축/궁궐건축물 |
유형 | 건축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이연노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광희문(光熙門)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조실록』 5년 9월 24일, 『숙종실록』 30년 2월 15일, 『숙종실록』 30년 9월 16일, 『숙종실록』 37년 6월 3일, 『중종실록』 29년 8월 22일 |
한양 성곽의 동남쪽에 설치한 소문.
개설
조선초에 한양으로 도읍을 정한 후 최초로 성곽을 조성할 때 사대문(四大門)과 사소문(四小門)을 두었다. 사대문으로 정북에 숙청문(肅淸門), 정동에 흥인문(興仁門), 정남에 숭례문(崇禮門), 정서에 돈의문(敦義門)을 설치했다. 사소문으로는 동북에 홍화문(弘化門), 동남에 광희문(光熙門), 서남에 소덕문(昭德門), 서북에 창의문(彰義門)을 두었다(『태조실록』 5년 9월 24일). 후에 홍화문은 혜화문이 되었고, 소덕문은 소의문이 되었다.
내용
광희문은 속칭 수구문(水口門)이라고 한다. 조선초에 성문을 만들면서 광희문이라고 명명했지만 조선초기의 『조선왕조실록』에서 광희문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정식 명칭인 광희문 대신에 수구문이 등장한다. 이런 현상은 『승정원일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18세기 초반 영조 이전의 기록에서는 대부분 광희문 대신에 수구문이라는 명칭으로 등장하며, 이후 수구문과 광희문이 혼용되다가, 1784년(정조 8) 이후 수구문이 사라지고 광희문이 대신하고 있다.
수구(水口)는 풍수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성곽 내에 흐르는 개천을 일컫는다. 수구는 내수구와 외수구로 나뉘는데, 한양의 경우 청계천이 내수구에 해당하고 한강이 외수구에 해당한다. 청계천의 물줄기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나간다. 따라서 한양 성곽에는 청계천이 빠져나가는 곳에 수문(水門)을 설치했다. 수문은 흥인문 남쪽에 위치하는데, 오간수문(五間水門)이라고 했다.
남산자락에서 시작한 물줄기 역시 광희문 북쪽으로 흘러나간다. 이곳에도 수문을 만들었는데, 이를 이간수문(二間水門)이라고 했다. 2개의 물줄기 중 훨씬 중요하고 큰 물줄기가 흥인문 인근을 통해 흘러갔는데, 흥인문이 아닌 광희문을 속칭 수구문이라고 부르는 연유는 명확히 알 수 없다. 아마도 풍수적인 관점에서 정동 방향보다 동남쪽으로 수구가 형성되는 것이 훨씬 이상적이기 때문에 동남쪽의 광희문을 수구문이라고 칭한 것으로 추정한다.
광희문 밖으로 난 길은 왕십리로 이어지고 동교(東郊)에 이른다. 이곳에는 두모포(豆毛浦)가 위치하였다. 두모포는 북한강과 남한강을 따라 내려온 물자들이 모이는 대표적인 항구이다. 이곳에 도착한 물자들은 광희문을 통해 한양으로 옮겨졌다.
한양 성곽은 임진왜란으로 크게 파괴됐다. 임진왜란 이후 한양 성곽에 대한 일부 보수가 있었지만 크게 부족했다. 본격적인 한양 성곽 복구는 한참이 지난 1704년(숙종 30)에 시작했다(『숙종실록』 30년 2월 15일)(『숙종실록』 30년 9월 16일). 곳곳에서 무너져 내린 성벽을 보수하고 다시 설치하는 공사가 몇 년간 계속됐다. 성곽 공사가 거의 완료되면서 광희문을 새롭게 설치하자는 논의가 있었다. 『승정원일기』 1711년(숙종 37) 2월 15일자 기록에 따르면 기존의 광희문은 철거하고 새롭게 성곽을 쌓기로 했으며, 광희문의 좌우측 성곽도 다시 쌓기로 했다. 기존에 없던 광희문 문루를 새롭게 건립하자는 논의도 있었다. 『승정원일기』 1711년 3월 14일자 기록에 따르면, 광희문 문루는 흥인문이나 숭례문과 같이 높게 만들 필요가 없고 단지 남한산성의 문루 제도를 따라 만들도록 지시했다. 광희문의 성곽 공사는 2달여 만인 1711년 4월 21일에 마쳤다. 성곽 공사를 마쳤지만 문루를 조성하는 공사는 문루를 건설할 재목을 마련하지 못해 약간 뒤로 미루어져(『숙종실록』 37년 6월 3일), 같은 해 10월 29일에 완성됐다. 1719년(숙종 45) 1월 25일에는 이미 문루가 완성됐으니 국초(國初)와 같이 광희문이라는 현판을 내걸어야 한다는 제안이 있었고, 2월에 현판을 내건 것으로 여겨진다.
숙종 때 광희문의 문루가 완성됐지만 문루에 단청을 칠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승정원일기』 1743년(영조 19) 11월 10일자 기록에 광희문은 병자년에 외적을 피해 인조께서 피난 가신 길이라면서 문루는 있는데 왜 단청을 하지 않았는지 이상하다고 의아해했다. 이후 영조는 광희문에 단청을 칠하라고 지시했고, 1744년(영조 20) 4월 3일에 광희문 단청을 마쳤다. 1864년(고종 1)에는 광희문 수리를 진행했다. 서까래와 청판이 많이 썩어 손상됐고 기와 역시 탈락한 상태였다. 수리공사는 5월 15일에 시작해 바로 마친 것으로 여겨진다. 광희문의 문루는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이후 육축만 남아 있었다. 1975년에 새롭게 도로를 개설하면서 남쪽으로 15m 이건했고, 다시 문루를 중건했다.
관련사건 및 일화
광희문은 다른 성문과 달리 유독 시신이 나가는 문으로 많이 알려졌다. 일명 ‘시구문(屍口門)’이라고 지칭하는데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및 기타 사료에 시구문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시신과 관련한 사건은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양 성곽 내부에는 무덤을 만들지 못하게 했다. 따라서 한양에서 죽은 사람의 시신은 모두 성곽 바깥으로 옮겨져야만 했다. 왕실의 인산은 사대문을 이용한다. 하지만 왕실을 제외한 사람들은 소문을 이용하는데 한양 동쪽으로는 광희문을 통해 나갔고, 서쪽으로는 서소문(西小門)을 통해 나갔다(『중종실록』 29년 8월 22일). 이런 까닭에 광희문과 서소문 바깥쪽에는 공동묘지가 많이 만들어졌다. 시구문이란 별칭은 이 때문에 불린 듯하다.
참고문헌
-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
- 서울특별시, 『서울건축사』, 서울특별시, 1999.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