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혜서(廣惠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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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5년(연산군 11) 궁중 나인의 상장례를 주관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설치한 관서.

개설

광혜서는 연산군 때 일시적으로 설치한 관서로, 주로 궁중 나인의 상장례(喪葬禮)를 주관하였다. 중종반정 직후인 1506년(중종 1) 9월에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광혜서는 1505년 10월 15일 왕의 전교로 설치되었다(『연산군일기』 11년 10월 15일). 동시에 나인들의 호상(護喪)을 위해 추혜서를 같이 설치하였다. 이때 나인들은 통상의 궁중 나인들이기보다는 연산군이 1504년 이후 전국에서 모은 기녀(妓女)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산군은 이들 기녀의 수용을 위해 연방원(聯芳院)·함방원(含芳院) 등을 만들어 거처하게 하였고, 이들의 양식과 식사를 위해 호화고(護花庫)와 전비사(典備司)를 두었다. 광혜서 역시 이들의 편의를 위해 설치한 것이다.

조직 및 역할

광혜서는 궁중 내 나인들의 상장례를 주관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구체적인 구성이나 조직은 알 수 없다. 광혜서는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尹氏)를 모신 사당인 효사묘(孝思廟) 옆에 위치하였다.

변천

중종반정이 성공한 직후인 1506년 9월 6일 영의정유순(柳洵) 등의 건의에 따라 추혜서·영혜서 등과 함께 폐지되었다(『중종실록』 1년 9월 6일).

참고문헌

  •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
  • 「경도(京都)」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화동기원변증설(華東妓源辨證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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