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지문(창덕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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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북쪽 바깥 담장에 설치한 문.

개설

『궁궐지(宮闕志)』에 “창덕궁 남문은 돈화문(敦化門), 단봉문(丹鳳門), 북문은 광지문(廣智門), 서북문은 요금문(輝金門), 동문은 건양문(建陽門), 서문은 경추문(景秋門), 금호문(金虎門)이고, 안쪽에 어구교(御溝橋)가 있다.”고 기술되어 창덕궁의 북문이 광지문임을 알 수 있다.

내용

본래 광지문은 따로 문 이름이 없다가 1475년(성종 6)에 예문관(藝文館) 대제학(大提學)서거정(徐居正)이 전교를 받들어 지었다. 광지문은 외북장문(外北墻門)의 명칭이었다(『성종실록』 6년 8월 23일).

창덕궁 후원 북쪽 담장은 지대가 높은 응봉 자락에 해당한다. 이곳에 문을 만들고 군사를 배치했더니 궁궐의 후원 내부가 군사들에게 노출되는 문제점이 있었다. 따라서 1497년(연산군 3)에 “광지문 밖의 경비하는 곳이 후원을 내려다보게 되고, 너무 문에 가까워서 파수 숙직하는 군사가 들여다보는 폐단이 있으니, 영(營)을 낮은 곳으로 물려서 문만 바라다보게만 하면 가하다.” 하며 군사 주둔지를 지대를 낮춰 옮기게 했다(『연산군일기』 3년 5월 23일).

그런데 이후 사료에서는 창덕궁 광지문을 찾아보기 어렵다. 『승정원일기』 1629년(인조 7) 3월 21일자 기록에서 광지문 인근의 소나무를 벌채하는 내용만 찾아볼 수 있다. 19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동궐도(東闕圖)」에도 창덕궁 후원 북쪽 궁장에는 오직 건무문(建武門)만 묘사되어 있고 광지문이 보이지 않는다. 건무문은 사료에서 1784년(정조 8)에 처음 등장한다. 『승정원일기』 1784년(정조 8) 6월 22일자 기록에는 광지영(廣智營) 서변에서부터 건무문 동변까지의 궁장이 가라앉았으니 빨리 개축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 광지문 대신에 광지영이 기록되었다.

광지영에 대해 『만기요람(萬機要覽)』「군정편」 훈련도감(訓鍊都監) 공해(公廨)조에서는 “응봉 아래에 있는데 15칸이다.”고 했다. 창덕궁 궁장을 수비하는 영 가운데 집춘영(集春營)이 있는데, 집춘영은 집춘문에 설치한 영이다. 따라서 광지문에 설치한 영이 광지영이라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기록에 광지문 대신 광지영이 등장하는 것은 이미 광지문을 폐쇄하고 이곳을 수비하는 영만 계속해서 운영한 결과로 판단된다. 광지문을 폐쇄하는 대신에 동쪽 편에 건무문을 새롭게 만들었을 가능성도 크다. 이는 모두 광지문이 위치한 곳에서 창덕궁 후원이 쉽게 노출되기 때문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희궁에도 광지문이 있는데, 왕이 경희궁 안에서 출궁하는 문로 중 하나이다. 이 광지문은 양덕당(養德堂)의 계명문(啓明門) 밖 동북쪽 인근에 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만기요람(萬機要覽)』「동궐도(東闕圖)」
  • 서울학연구소 역, 『궁궐지(宮闕志)』1, 서울학연구소,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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