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운지보(廣運之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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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고종 26)에 제작한 여러 국새 가운데 하나 또는 명나라에서 제작한 24과의 새보 가운데 하나.

개설

1889년에 준명지보(濬明之寶), 동문지보(同文之寶), 흠문지보(欽文之寶), 명덕지보(命德之寶)와 함께 제작한 국새이다. 다른 국새에 비해 광운지보의 용도는 문헌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한편 명나라에서 제작한 24과(顆)의 새보(璽寶) 가운데 하나인 광운지보는 주로 황제의 칙지(勅旨) 및 성지(聖旨), 어람서(御覽書), 어필(御筆) 등에 찍은 인장이다.

연원 및 변천

조선시대 문헌에는 광운지보에 대한 기록이 여럿 보이는데, 대부분 명대(明代) 24새보의 하나로 성지와 서적 등에 찍었던 인장에 대한 내용이다. 1487년(성종 18) 성종은 “성지에 광운지보가 찍혀 있으니, 그것은 황제의 명이 분명하다. 내관이 어찌 인장을 도용할 수 있겠는가?”(『성종실록』 18년 6월 14일)라고 하였다. 이후 1603년(선조 26)에는 명신종(神宗)이 선조에게 보낸 칙서의 내용이 실려 있는데, 이 문서에 광운지보가 찍혀 있었다고 한다(『선조실록』 36년 6월 19일). 이를 통해 15~16세기에 명나라에서 황제가 문서를 보낼 때 광운지보를 찍은 사례가 확인된다.

한편 광운지보는 명나라 조정에서 어람(御覽)의 서적과 어필에 사용한 사실이 파악된다. 1741년(영조 17) 영조는 홍문관에 명하여 명나라 조정의 책을 모아서 간직하도록 하였는데, 이때 검토관 이성중(李成中)이 옛날 홍문관에 소장된 책을 열람하다가 북경본[燕本]인 『역대통감찬요(歷代通鑑纂要)』를 찾아 올렸다. 영조가 연신(筵臣)에게 내보이며 책의 상단에 찍힌 광운지보는 어느 시대의 인장인지를 하문하자 기사관 황경원(黃景源)이 명나라의 인장임을 답하고, 자신이 일찍이 명나라 조정의 병부상서전응양(田應暘)의 제서모본(制書摹本)을 보았는데, 역시 이 어보가 찍혀 있었음을 아뢰었다. 영조는 “지금 이 책은 명나라 조정의 옥새(玉璽) 흔적이 보존된 것으로 전자(篆字)의 획이 아직도 분명하며, 보주(寶朱)가 새로운 듯하니 매우 기이하다.”며 홍문관의 관원으로 하여금 그 남은 책을 모아 보배처럼 소중히 간직하라고 명하였다(『영조실록』 17년 4월 4일).

또한 1746년(영조 22) 원경하(元景夏)가 영천(榮川) 김륵(金玏)의 집에 명나라 신종이 하사한 『대학연의(大學衍義)』 1부가 있고, 권수에 2개의 어보가 찍혀 있는데 하나는 광운지보, 하나는 흠문지새(欽文之璽)로 인주가 아직 선명하다는 보고하자, 그 책을 올려 바치도록 한 기사가 보인다(『영조실록』 22년 8월 22일).

명대의 서적과 황제의 어필에 광운지보가 찍힌 사실을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사례로 이유원(李裕元)의 『임하필기(林下筆記)』를 들 수 있다. 이유원은 소싯적에 한 고가(故家)의 서적 속에 있는 중국본 『송원강목(宋元綱目)』에 광운지보가 찍혀 있어 그것이 내부(內府)의 물건임은 알았으나, 어느 때의 도장인지는 분변하지 못하였다고 하고, 뒤에 강화도의 외규장각(外奎章閣)에 소장된 황명어필(皇明御筆)을 봉심(奉審)하였는데, 거기에 찍힌 광운지보가 서책에 찍힌 인영과 똑같았다고 하였다.

조선에서는 개화기를 전후하여 새로 여러 종류의 국새를 제작하였고, 용도에 맞게 사용하였다. 이때 광운지보도 제작하였는데, 용도는 확인되지 않는다. 보인의 규격과 사용처를 정리한 『보인부신총수(寶印符信總數)』, 『이조새보인압부신의제(李朝璽寶印押符信の制)』 등에도 용도가 기재되어 있지 않다. 이 국새가 찍힌 책이나 문서도 발견되지 않았고, 국새의 실물도 소재를 확인할 수 없다.

형태

『보인부신총수』에 의하면 재질은 천은도금(天銀鍍金), 인장의 손잡이 부분인 뉴식은 귀뉴[龜鈕], 인면의 길이는 방(方) 3촌 5푼으로 기재되어 있다. 서체는 명나라의 광운지보를 모방하여 소전(小篆)으로 양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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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임하필기(林下筆記)』34권, 「華東玉糝編」
  • 『이조새보인압부신의제(李朝璽寶印押符信の制)』
  • 『보인부신총수(寶印符信總數)』,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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