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양현(光陽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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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광양시에 설치된 조선시대 지방 관청이자 행정구역 명칭.

개설

고려 1172년(고려 명종 2)에 광양현에 감무가 파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348년(고려 충목왕 4)에는 광양현에 감무가 파견된 것이 기록으로도 확인된다. 조선이 건국한 후 1409년(태종 9)에 광양현이 관할해 오던 2향 12소 4부곡을 폐지하여 광양현에 편입하였다. 1413년(태종 13)에는 감무를 고쳐서 광양현감으로 하였다. 1455년(세조 1)에 광양현이 전라도 순천진(順天鎭)의 좌익을 맡았다. 1457년(세조 3)에는 광양현이 전라도 7진 가운데 하나인 순천진에 속했다. 1598년(선조 31)에 왜란으로 입은 피해 때문에 광양현을 폐지하고 순천도호부에 편입시켰다가 곧 복구하였다. 1660년(현종 1)에는 전패(殿牌) 도난 사건이 일어나 광양현이 폐지되었다가, 1664년(현종 5)에 원래대로 복구하였다. 1869년(고종 6)에 일어난 변란에 연루되어 광양현감을 여러 현의 맨 끝자리로 강등시켰다. 1871년(고종 8)에 삼군부(三軍府)가 해안 방어의 강화 차원에서 광양현에 포군(砲軍) 100명을 두었다. 1895년(고종 32)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광양현이 폐지되었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사』에는 940년(고려 태조 23)에 광양현으로 고쳐서 승평군에 소속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983년(고려 성종 2)에는 승평군에서 승격된 승주목의 관할 아래로 광양현이 들어갔다. 광양현에 감무가 파견된 것을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1348년이다. 그보다 앞서 광양현에 감무가 파견된 것은 확실하지만 그 시기가 분명하지 않다. 1172년에 광양현에 감무가 파견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1409년에 도관찰사(都觀察使)윤향(尹向)이 건의하여, 수령이 파견되지 않은 현과 향·소·부곡은 거의 모두 본 고을에 합쳐졌다. 이때 광양현이 관할해 오던 2향 12소 4부곡이 폐지되어 광양현의 직촌(直村)이 되었다. 2향은 본정(本井)과 삼일(三日)이며, 12소는 문현(蚊峴)·노을도(奴乙道)·골약(骨若)·거의포(車衣浦)·구량포(仇良浦)·공촌(孔村)·다사천(多沙川)·대곡(大谷)·실점(實岾)·오정(烏頂)·지암천(知巖川)·웅음(熊陰)이다. 4부곡은 아마대(阿麻代)·사어곡(沙於谷)·아민(阿民)·율촌(栗村)이다. 1413년에 감무를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조직 및 역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광양현에 종6품 현감(縣監) 1인과 종9품 훈도(訓導) 1인을 둔다고 되어 있다. 현감은 종6품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를 겸하였다. 훈도는 5백 호 이상인 고을에는 모두 두기로 한 것에 따른 것이다(『세종실록』 12년 1월 21일). 광양현감 밑에 중앙 관제와 마찬가지로 이·호·예·병·형·공 6방을 두었다. 현감 아래 향청(鄕廳)의 향임(鄕任)으로 좌수(座首)와 별감(別監) 등을 두었다. 이들은 6방을 나누어 장악하여 현감의 지방 행정을 보좌하였다. 향임은 대부분 부세의 분배와 징수, 향풍의 교정, 향리의 감찰 등을 맡았다.

1447년(세종 29)에 연변(沿邊)의 수령을 무재(武才)가 있는 자로 임명하고, 긴요(緊要)한 정도에 따라 무관 임명 때도 차등을 두게 하였다. 하긴(下緊)으로 분류된 광양에는 비록 무과(武科)나 무재록(武才錄)에 오르지 못하였을지라도 이재(吏才)와 지략을 겸비한 자를 가려서 임명하기로 하였다(『세종실록』 29년 9월 4일). 1500년(연산군 6)에는 광양을 비롯하여 순천·보성·낙안·장흥·강진·해남 같은 지역의 수령은 무과 출신자를 임명하여 방비하자는 논의가 있었다(『연산군일기』 6년 3월 8일). 그것이 바로 시행되지는 않았지만, 명종대 이후는 무과 출신자를 이 지역 수령으로 파견하였다.

변천

『증보문헌비고』에 따르면 1598년에 왜란으로 큰 피해를 입은 광양현을 폐지하고 순천도호부에 편입시켰다. 그 뒤 곧 복구하였으나 그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1660년에는 광양현에서 전패를 훔쳐 간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 일로 고을 이름만 폐지하고 수령에게는 죄를 주지 않았다(『현종실록』 1년 11월 13일) (『현종개수실록』 1년 11월 15일). 『광양군지』 선생안에 따르면 1664년에 원래대로 광양현을 복구하였다. 1869년에 일어난 변란에 광양에서 거주하는 민회행(閔晦行)과 이재문(李在文)이 연루되어 있다 하여, 광양현감을 여러 현의 맨 끝자리로 강등시켰다(『고종실록』 6년 6월 8일).

1455년에는 각 도의 내지(內地)에도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주변의 여러 고을을 중·좌·우익으로 나누어서 소속을 정하였다. 이때 광양현을 전라도 순천진(順天鎭)의 좌익으로 삼았다(『세조실록』 1년 9월 11일).

1457년에 각 도의 중·좌·우익을 폐지하고 거진을 설치하였다. 이른바 진관(鎭管) 체제로 바뀌면서 전라도에는 7곳에 거진이 설치되었는데 광양현은 전라도의 순천진에 속했다(『세조실록』 3년 10월 20일).

조선후기에는 순천거진이 전라전영(全羅前營)으로 바뀌었다. 전영(前營)의 속읍은 순천·장흥·진도·낙안·보성·강진·흥양·동복·광양·해남 10곳이며, 전영의 병수(兵數)는 마병(馬兵) 5초(哨), 속오(束伍) 46초, 표하군(標下軍) 188명, 당보군(塘報軍) 120명, 수솔군(隨率軍) 895명으로 되어 있다.

1871년에 삼군부가 전라도의 각 군에 포군을 설치하였는데, 이 가운데 광양현에 포군 100명을 두었다(『고종실록』 8년 4월 29일).

1895년에 8도제가 폐지되고 23부제가 시행되면서 광양현이 폐지되었다. 1896년(고종 33)에 전국 23부를 다시 13도로 개정할 때 전라남도와 전라북도가 분리되었다. 전라남도는 수부(首府)를 광주에 두었으며, 광양군을 비롯한 32개 군과 제주목의 1목으로 편성되었다. 같은 해에 돌산군이 신설되면서 광양군에 딸려 있던 9개 섬이 그곳으로 이관되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경국대전(經國大典)』
  • 『대전통편(大典通編)』
  • 『대전회통(大典會通)』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대동지지(大東地志)』
  • 『여지도서(輿地圖書)』
  • 『의안·칙령(議案·勅令)』
  • 김정호, 『지방 연혁 연구-전남을 중심으로』, 광주일보출판국, 1988.
  • 박종기, 『지배와 자율의 공간, 고려의 지방사회』, 푸른역사, 2002.
  • 손정묵, 『한국지방제도·정치사연구(상)-갑오경장~일제강점기-』, 일지사, 2001.
  • 이수건, 『조선시대 지방행정사』, 민음사, 1989.
  • 이존희, 『조선시대 지방행정제도 연구』, 일지사, 1990.
  • 『광양시지』, 광양시지편찬위원회, 2005.
  • 『순천시사』, 순천시사편찬위원회, 1997.
  • 『전라남도지』, 전라남도지편찬위원회, 1993.
  • 『전라북도지』, 전라북도,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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