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부(鑛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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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철 등 광물을 캐는 인부.

개설

광부(鑛夫)는 조선시대 광산에서 광물을 캐는 일에 종사하던 인부이다. 조선전기에는 광산의 인부가 부역(負役) 체계에 따라 종사하였다면, 후기에는 임노동자들이 양산되면서 전업적인 광부가 등장하였다. 또한 광업의 특성상 작업 과정을 채굴과 제련으로 구분할 때, 협의로 보면 채굴 과정에서 작업하는 자들을 광부로 보고 제련 과정에서 작업하는 자들은 야장(冶匠)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하지만 광의로 보면 이들을 모두 광부로 규정할 수 있다.

담당 직무

광부들의 역할은 주로 갱도에서 광석을 캐는 일이지만, 넓게 보면 갱목 운반, 제련 작업, 광물 운반 등 광산을 경영하기 위한 제반 작업을 포괄한다.

변천

광업은 17세기에 관(官) 주도하의 감관제(監官制)에서 별장제(別將制), 18세기 말에 다시 수령수세제(守令收稅制) 형태로 변하였다. 이러한 운영 체제의 변화는 광부들을 동원하는 형태의 변화를 수반하는 것이었다.

감관제에서 광부는 부역 체계에 따라 서민들이 신역(身役)으로 충원되는 것이 주 형태였다. 이러한 형태에서 광물의 생산성 향상과 국가 수요의 증가에 대응하기 위한 방편으로 운영 체계가 변하였다. 선조 때 비변사에서는 기존의 감관제를 수정하자고 건의하였다. 우리나라에는 은(銀)과 철(鐵)이 생산되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하지만 광부와 광장(鑛長)이 찾아 낸 광맥은 많지 않고, 그 과정에서 백성들의 폐해만 늘어, 각처 백성들은 광부들에게 뇌물을 주면서 광맥을 찾지 못하게 하고 있다고 하였다. 또한 국용(國用)이 탕진되었고 그 중에서도 은을 확보하는 일이 가장 절급하다고 하면서, 품질이 좋기로 소문난 단천(端川)의 금령(禁令)을 풀고 채취를 허가하여 세금을 징수하자고 하였다. 그러면서 관에서도 직접 채굴하여 상납하는 수를 늘려 국용에 충당하자고 건의하였고, 선조는 이를 허락했다(『선조실록』 26년 8월 3일).

17세기에 들어서 광업의 운영 형태는 별장제로 바뀌어 갔다. 이것은 이른바 설점수세제(設店收稅制)를 의미한다. 별장제에서 은광의 경우 점장(店長)이 광맥을 발견하고 별장이 선정되면 호조(戶曹)의 경비로 설점(設店)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두목의 총괄하에 채굴·제련·벌목·운반 작업이 이루어졌으며 각 공정에 점장들의 지휘·감독을 받는 수많은 연군(鉛軍)들이 분속되어 분업적 협업으로 점역이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연군들은 주로 임노동자 형태로 충당되어 연군들에게는 매달 또는 매년 일정액의 노임이 지급되었다.

18세기 말엽에 이르면 광업은 각 지방의 감영과 수령이 수세(收稅)하는 형태로 바뀌어 갔고, 19세기에 이르면 물주제(物主制)가 활성화되는 것으로 파악된다. 물주제란 광산 개발을 위한 제반 비용을 물주가 부담하고, 그 지방의 실정을 잘 알고 있는 혈주와 덕대가 실질적으로 경영하는 형태였다. 이 경우에도 실질적 노동은 광군들이 담당하였고, 이들에게는 품삯에 해당하는 고가(雇價)가 지급되었다. 이 점에서 이 시기의 광부들 역시 임노동자 형태였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33: 조선 후기의 경제』, 국사편찬위원회,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