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명전(光明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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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궁 북쪽에 위치하며 장락전 서쪽, 영취정 남쪽에 놓인 전각.

개설

『궁궐지(宮闕志)』에 광명전(光明殿)은 융무당(隆武堂) 북쪽에 있으며 창경궁의 전각제도를 모방하여 지었다고 했다. 광명전의 모습은 「서궐도안(西闕圖案)」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다. 광명전 주변에는 행각과 담장을 둘러쌓아 궁궐의 다른 공간과 구분하였다. 남쪽 행각 중앙에는 건례문(建禮門)이라는 일각문을 세워 이곳을 통해 광명전에 출입할 수 있도록 했다. 또 광명전 서쪽에는 상휘당(祥輝堂)을 세워 복도로 광명전과 연결했고, 동쪽 행각에는 천성각(天成閣)을 두었다. 한편 광명전 뒤쪽 담장에는 회극문(會極門)을 만들어 경희궁 후원인 영취정(映翠亭)에 드나들 수 있게 했다. 『궁궐지』에는 광명전 동쪽에 경화당(景和堂)이 있고, 경화당 동쪽에는 예전에 단명전(端明殿)이 있었다고 기록되었다. 「서궐도안」에는 이들 건물이 있던 자리가 빈터로 묘사되었다.

내용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弘齋全書)』에는 「경희궁지(慶煕宮志)」라는 글이 수록되었다. 이 글에는 경희궁에 만들어진 많은 전각의 위치와 용도가 기술되었다. 「경희궁지」에서 “광명전이 있는데 내전(內殿)에서 하연(賀宴)을 받는 곳이고, 서북쪽 건물은 상휘당이라고 하며 협실(夾室)이다. 그 서쪽으로는 영취정과 춘화정(春和亭) 두 정자가 있는데 원정(苑亭)이며, 영취정의 경치에 대한 것은 기문에 상세하다.”고 기술되었다. 광명전이 내전에서 하연을 받는 곳이라는 기록을 통해 이 전각에서는 항상 즐겁고 기쁜 일이 많이 벌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궁궐지』 「광명전조」에는 영조가 지은 여러 어제문(御製文)이 전한다. 「광명전기회(光明殿記懷)」라는 제목의 글이 3편, 「옛날의 회포를 글로 써 광명전에 붙인 것을 추억하면서[憶昔記懷書付光明]」, 「장락전을 바라보고 광명전에 앉아 회포를 적다[瞻長樂光明記懷]」 2편, 「광명전기」가 수록되었다. 모두 지난날 광명전에서 직접 겪은 일들을 회상하면서 숙종 및 돌아가신 가족들에 대한 추모의 내용을 담은 글이다. 이들 글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행사는 가례(嘉禮)이다. 1702년(숙종 28)에 숙종과 계비인 인원왕후(仁元王后)김씨(金氏)의 가례가 광명전에서 치러졌다. 또 1704년(숙종 30)에는 영조 자신과 정성왕후(貞聖王后)서씨(徐氏)의 가례, 1718년(숙종 44)에는 경종과 선의왕후(宣懿王后)어씨(魚氏)의 가례, 1762년(영조 38)에는 세손인 정조와 효의왕후(孝懿王后) 김씨(金氏)의 가례가 광명전에서 치러졌다. 이후 1819년(순조 19)에는 효명세자(孝明世子)와 신정왕후(神貞王后)조씨(趙氏)의 가례가 광명전에서 치러졌다(『순조실록』 19년 10월 13일).

연회와 관련된 내용도 수록되어 있다. 「광명전기」에는 1710년(숙종 36) 봄에 어머님의 병이 나은 것을 축하하기 위해 연회를 광명전에서 베풀었고, 그해 여름에 또 다시 연회가 있었으며, 1714년(숙종 40) 가을에도 연회가 있었다고 기록되었다. 이들 연회에서 영조는 왕자의 자격으로 술잔을 올렸다. 1744년(영조 20)에는 영조가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것을 축하하는 축하연이 광명전에서 치러졌다. 「광명전기」는 1760년(영조 36)에 지은 것인데, 이때 ‘억석봉환(憶惜奉歡)’이라는 친필 현판도 같이 만들었다. 이후 친필 현판은 광명전 북쪽에 걸어 놓도록 하고, 기문은 남쪽에 걸어 놓도록 했다. 이들 외에 1719년(숙종 45), 1766년(영조 42), 1773년(영조 49)에도 내연을 광명전에서 치렀다.

하지만 최초로 사료에 등장하는 광명전은 즐겁고 기쁜 일과 거리가 멀었다. 1632년(인조 10) 6월 28일에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인경궁(仁慶宮) 흠명전(欽明殿)에서 승하하셨다(『인조실록』 10년 6월 28일). 당시 창덕궁, 창경궁은 이괄의 난으로 주요 전각이 모두 사라진 상황이었다. 이런 까닭에 인조는 광해군이 새로 만든 인경궁과 경덕궁을 이궁(離宮)으로 삼아 머물렀다. 원래 인조의 잠저였던 경덕궁에는 인조가 머물렀고, 경덕궁과 거리가 가까운 인경궁에는 인목대비가 머물렀다. 이런 와중에 대왕대비가 승하하면서 대왕대비의 시신을 급히 경덕궁으로 옮겼다. 이때 시신을 모신 빈전(殯殿)으로 광명전을 사용했다(『인조실록』 10년 7월 1일). 인목대비 외에도 광명전을 빈전으로 사용한 사례가 있다. 1730년(영조 6) 6월 29일에 경종의 계비인 선의왕후(宣懿王后)가 경덕궁 어조당(魚藻堂)에서 승하했을 때(『영조실록』 6년 6월 29일) 빈전으로 광명전을 사용했다.

그 밖에 여러 다른 용도로 사용한 내용이 사료에 전한다. 1661년(현종 2)에는 대왕대비인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에게 존호를 가상(加上)하고 왕대비인 효종 비 인선왕후에게 존호(尊號)를 올리는 의식을 치렀다. 이 중 대왕대비전에 존호를 가상하는 의식은 광명전에서, 왕대비전에 존호를 가상하는 의식은 흥정당(興政堂)에서 치렀다.

광명전에서 어진(御眞)을 모사한 일도 있었다. 1735년(영조 11)에는 영희전(永禧殿) 제2실의 세조 어진이 너무 오래되어 변색된 것을 광명전에서 새롭게 모사했다(『영조실록』 11년 8월 27일). 1837년(헌종 4)에는 태조의 어진을 광명전에서 모사했다. 이해 10월에 함경도 영흥 준원전(濬源殿)에 도둑이 침범해 태조 어진을 훼손한 사건이 있었다. 훼손된 어진은 함경도에서 한양으로 옮겨졌고, 모사가 완성된 후 다시 준원전에 봉안했다.

광명전 수리에 관한 내용이 『경덕궁수리소의궤(慶德宮修理所儀軌)』에 전한다. 1693년(숙종 19)에 이미 감역관(監役官)을 보내 경덕궁을 수리하였다. 하지만 일이 중대해 담당을 수리소로 격상하고 인력을 보충해 공사를 진행했다. 공사는 대전(大殿) 영역과 광명전 영역으로 나눠 실시했다. 대전 영역의 전각들은 무일합(無逸閤)처럼 완전히 허물고 다시 건설한다거나, 융무당에 동행각을 덧붙인다거나, 사현합(思賢閤)에 퇴칸을 첨가하는 등 형태적으로 큰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광명전 영역은 세자궁 쪽에 부속 공간을 지은 것 외에는 커다란 변화 없이 기존 건물을 수리하는 정도에 그쳤다.

1782년(정조 6)부터 1785년(정조 9)까지 광명전이 허물어졌다는 내용이 『승정원일기』에 계속해서 등장한다. 경희궁을 사용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건물이 계속 퇴락하였다. 하지만 정세가 좋지 않아 쉽사리 수리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수리를 어떻게 진행했는지, 언제 마쳤는지에 대한 내용은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광명전 수리를 지시하면서 광명전이라는 전각의 성격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매우 특이하다. 1783년(정조 7) 1월 12일에는 광명전에 대해 내정전(內正殿)이라고 했으며, 같은 해 7월 17일에는 광명전이 대내(大內)의 조하(朝賀)를 받는 정전(正殿)으로 인정전(仁政殿), 명정전(明政殿)과 차이가 없다고 했다. 광명전이 경희궁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막대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다.

참고문헌

  • 『경덕궁수리소의궤(慶德宮修理所儀軌)』
  • 『대왕대비전왕대비전존숭도감도청의궤(大王大妃殿王大妃殿尊崇都監都廳儀軌)』「서궐도안(西闕圖案)」
  • 서울학연구소 역, 『궁궐지(宮闕志)』2, 서울학연구소,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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