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국지경록(光國志慶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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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587년(선조 20) 종계변무(宗系辨誣)를 마치고, 여러 신하들과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직접 시를 짓고, 신하들이 화답한 것을 모아 1701년(숙종 27)에 편찬한 『광국지경록(光國志慶錄)』을 1744년(영조 20)에 다시 새긴 판목으로 된 시집이다.

개설

중국 명(明)나라 『태조실록(太祖實錄)』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잘못 기록된 조선 왕가의 계보를 1744년(영조 20)에 와서, 바로 잡게 된 것을 축하한 시를 모아 목판에 새긴 것이다. 이는 조선태조 이성계가 고려 문신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중국 사서에 잘못 기록되어, 조선 전기부터 1584년(선조 17)까지 이를 고치기 위해 여러 차례 사신을 파견해왔으나, 명나라에서는 계속해서 이를 거절하고 있었다. 1584년에 황정욱(黃廷彧, 1532~1607) 등을 사신으로 보내, 『태조실록』의 기록을 바로 잡았으며, 1587년(선조 20)에 유홍(兪泓)이 다시 들어가, 고쳐진 『대명회전』 가운데 조선에 관련된 한 본을 받아왔고, 1589년(선조 22)에 윤근수가 성절사로 가서 개정된 『대명회전』을 가져오자, 1590년(선조 23)에 공로가 큰 19명을 선정하여, 이들을 3등급으로 구분하여 공신으로 책봉하였다.

이 때 종묘에 고하고 축하시를 짓게 하여, 이를 모아 1701년(숙종 27)에 숙종의 글과 시를 덧붙여 이를 간행하였다. 이를 다시 1744년에 영조의 서문과 유홍의 화답시를 비롯하여, 축시들을 수록하여 간행하였다.

편찬/발간 경위

이 책은 종계개정(宗系改正)과 관련된 경하시집(慶賀詩集)이다. 명(明)나라의 『태조실록』과 『대명회전』에 조선태조의 출생이 고려의 권신 이인임의 아들로 잘못 기록되자, 조선에서 정정해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그러던 중 1584년(선조 17)에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 황정욱이 명나라에 가서 변무의 일을 성사시켜, 잘못된 부분을 고친 것을 확인받았으며, 1587년(선조 20)에 종계시정사은사(宗系是正謝恩使) 유홍이 다시 명나라로 가서, 황지(皇旨)를 얻어내어 속찬한 『대명회전』을 가지고 오게 되었다. 선조는 모화관(慕華館)으로 나가 명나라의 칙사를 맞고, 종묘에 종계시정의 고유제(告由祭)를 지내고, 특사령(特赦令)도 내렸다.

1590년(선조 23)에는 종계시정에 공이 있는 황정욱·유홍 등에게 광국공신(光國功臣)의 훈명(勳名)을 내림과 동시에 유홍이 귀국할 때에 산해관(山海關) 주사(主事)마유명(馬維銘)이 송별시를 지어준 것과 유홍 자신의 화답시(和答詩) 2수를 지어 왕에게 올리자, 선조는 사신에게 명하여 응제(應製)하게 하였다.

1701년(숙종 27)에 종신(宗臣) 영원정(靈原正)이헌(李櫶, 1669~1730)이 당시 마유명과 유홍의 시, 그리고 선조의 어제와 신료들이 갱화한 시들을 수집하여 선조와 숙종의 어제서(御製序)와 응시(應詩)를 붙여 이 책을 개간(開刊)하였다.

이 판목은 1744년(영조 20)에 1701년판의 내용에 영조의 어제어필, 특사시(特赦時)의 전교(傳敎), 산문(散文), 대제학이산해(李山海)가 명나라 황제에게 올린 사은표(謝恩表), 종계가 변무된 사안에 대한 태학 유생들의 시를 모은 태학유생헌축(太學儒生獻軸) 등을 추가하여 중간(重刊)하였다. 이조판서이여(李畬, 1645~1718)가 쓴 발문에는 선왕의 뜻을 계술한 숙종의 효성과 명나라 왕조의 은혜를 찬양하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서지 사항

1책 41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목판본이다. 사변쌍변(四周雙邊)이고, 반곽(半郭)은 23.3×17.1cm이다. 7행 16자의 유계(有界), 상하내향2엽화문어미(上下內向2葉花紋魚尾)를 갖추고 있고, 크기는 31.0×21.0cm이며, 청주활자박물관, 미국버클리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이 책은 명나라 『태조실록』과 『대명회전』에 조선태조 이성계(李成桂)가 고려 권신(權臣) 이인임의 아들로 잘못 기록되어 있어, 국초(國初)부터 1584년(선조 17)까지 이를 정정하기 위하여 누차에 걸쳐 사신을 파견하였으나, 명나라에서 『태조실록』은 고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1584년(선조 17)에 5월 종계변무주청사 황정욱 등을 보내어 그것을 고쳤으며, 1587년(선조 20)에 유홍이 다시 들어가 중수된 『대명회전』 가운데 조선에 관계된 한 본을 받아왔고, 1589년(선조 22)에 윤근수(尹根壽)가 성절사(聖節使)로 가서 개정된 『대명회전』을 가져오자, 1590년(선조 23)에 공로가 뚜렷한 19명을 선정, 이들을 다시 세 등급으로 구분하여 논공한 뒤 공신으로 책봉하였다. 1등은 윤근수, 황정욱, 유홍 등 3인으로 수충공성익모수기광국공신(輸忠貢誠翼謨修紀光國功臣)이다.

이 때 종묘(宗廟)에 고(告)하고 축하시를 짓게 하였고, 이를 모아 1701년(숙종 27년)에 선조, 숙종의 서(書)와 응시(應時)를 붙여 간행한 것을 다시 1744년(영조 20)에 이조판서이여가 영조의 서와 마유명의 시와 유홍의 화시(和詩)를 비롯하여 사신들의 시, 특사교문(特使敎文), 이산해의 사은표(謝恩表), 태학유생(太學儒生)들의 헌축(獻軸) 등을 수록하여 간행하였다. 이 판각은 후손 이언억(李彦億)이 1744년 간행본을 본으로 하여, 1771년(영조 47) 이전에 일가 간에 나누어 주기 위하여, 제작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의의와 평가

이 판목은 영조 대에 다시 중간되었다는 점에서 당시 종계변무 사안의 중요성을 시기별로 확인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 김순희, 「『光國志慶錄』의 考察」, 국립중앙도서관, 1999.
  • 김호용, 「「光國志慶錄」에 관한 硏究」, 청주대학교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7.
  • 박문열·김동환, 「「光國志慶錄」의 校勘에 관한 硏究」, 『서지학연구』 제38집, 한국서지학회, 2007.
  • 이상옥, 「光國志慶錄의 由來」, 서울신문사, 19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