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덕전(觀德殿)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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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관덕전 |
한글표제 | 관덕전 |
한자표제 | 觀德殿 |
관련어 | 경산(景山), 경산공원(景山公圓), 조전례(祖奠禮) |
분야 | 정치/외교/사행 |
유형 | 건축 |
지역 | 중국 |
시대 | 청/조선 |
왕대 | 청/조선 |
집필자 | 김소영 |
장소 | 북경 경산공원(景山公圓) |
규모(정면/측면/칸수) | 약 20㎡의 넓이, 건물 주변에 관덕교(觀德橋), 궁문(宮門), 관덕문(觀德門) 등 조형물과 배전(配殿), 후전(后殿), 후전이방(后殿耳房) 등의 부속건물이 있음. |
관련 인물 | 가경제(嘉慶帝), 건륭제(乾隆帝), 순치제(順治帝), 효헌황후(孝獻皇后)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관덕전(觀德殿)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정조실록』 23년 6월 21일, 『순조실록』 20년 11월 27일 |
중국 북경의 경산공원 내에 위치한 건물.
개설
관덕전은 북경자금성(紫禁城)에 위치한 경산(景山) 내에 있는 건물의 명칭이었다. 황제나 황후의 사망 직후 시신을 안치하고, 조전례(祖奠禮)를 행하는 장소였다.
위치 및 용도
경산 조성 이후인 1600년, 금(金)나라와 원(元)나라 때 건축물이 있던 부지에 만들었다. 영사전(永思殿)의 동남쪽, 호국충의묘(護國忠義廟)의 서쪽 담장에 위치하였다. 관덕이라는 명칭은 『사기』의 “이런 까닭으로 군자는 바른 감정으로 돌아가서 그 뜻을 화평하게 하고 악을 넓혀서 가르침을 이룬다. 악이 행하여져서 사람이 바른 도리로 지향해서 덕을 볼 수 있다[是故君子反情以和其志, 廣樂以成其敎, 樂行而民鄕方, 可以觀德矣].”는 문구에서 따왔다.
본래 연무(演武)를 관람하거나 신하들의 도덕과 품행을 관찰할 때 사용하던 용도로 건축하였다. 1660년 순치제가 총애하던 효헌황후가 22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관덕전에 장례 때까지 안치하였다. 이후 장례의식 직전 황제나 황후의 관을 안치하고, 발인 전 영결을 고하는 제사 의식인 조전례를 행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변천 및 현황
경산은 만세산(萬歲山)·매산(煤山)·진산(鎭山)이라고도 불리었다. 1406년 명의 황제인 영락제는 북경으로 천도하면서 남경(南京)의 궁전을 모방해 궁전을 짓도록 하였다. 그 결과 1420년 자금성이 건립되었다. 풍수지리사상에 근거하여 궁궐 북쪽에 산이 없었기 때문에, 궁궐 주변에 해자(垓子)와 연못을 조성하면서 퍼낸 흙을 이용하여 인공 산을 쌓은 것이 경산이었다. 명·청대에 경산은 북경에서 가장 높은 지대였다. 명대에 매산이라고 부르던 것을 1655년 경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00년 의화단운동(義和團運動) 당시, 팔국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하면서 경산을 파괴하였다. 신해혁명(辛亥革命) 이후 「청실퇴위우대조건(清室退位優待條件)」에 따라, 경산은 청 황실의 재산으로 인정받았다. 1924년 풍옥상(馮玉祥)이 이끄는 부대가 경산을 점령한 후, 부의(溥儀)를 자금성(紫禁城)에서 강제로 퇴거시키고 군대가 주둔하도록 조치하였다. 1928년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이 관리하는 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 건립 이후인 1955년 일반인에게 공원으로 개방되었다.
관련사건 및 일화
조선에는 1899년 건륭제 사망 시(『정조실록』 23년 6월 21일), 그리고 1820년 가경제 사망 시(『순조실록』 20년 11월 27일) 경산의 관덕전에 청 황제 시신이 모셔져 있는 것과 관련한 사실이 알려졌다.
참고문헌
- 『명실록(明實錄)』
- 『청실록(淸實錄)』
- 서울대학교 동양사학연구실 편, 『강좌 중국사 6: 개혁과 혁명』, 지식산업사, 1989.
- 이블린 S. 로스키 지음, 구범진 옮김, 『최후의 황제들: 청 황실의 사회사』, 까치,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