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종번(郭宗藩/郭宗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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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생년미상∼1504년(연산군 10).] 조선 전기 성종~연산군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사헌부 장령(掌令)이다. 자(字)는 지한(之翰)이고, 호(號)는 남계(南溪)이다. 본관은 현풍(玄風)이다. 아버지는 장사랑(將仕朗)곽황(郭隍)이고, 어머니 박씨(朴氏)는 박인효(朴仁孝)의 딸이다. 사간원 사간(司諫)곽종원(郭宗元)의 형이다.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동생 곽종원과 함께 참화(慘禍)를 당하였다.

성종 시대 활동

1483년(성종 14) 사마시(司馬試)에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다.[<사마방목>]

1490년(성종 21)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문과방목>]

1491년(성종 22) 중학(中學)의 훈도(訓導)가 되었고, 그 뒤에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연산군 시대 활동

1497년(연산군 3)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다. 이때 연산군이 견성사(見性寺)를 중창(重創)하려고 하자, 정언곽종번(郭宗蕃)은 지평신복의(辛服義)와 함께 절을 중창(重創)하는 문제에 대하여 반대하였다.

1498년(연산군 4) 사헌부 지평(持平)으로 전임되었다. 이때부터 곽종번은 간관(諫官)으로서 연산군에게 바른 소리를 하였으므로, 연산군은 그를 매우 싫어하였으나, <무오사화(戊午士禍)>에 연루되어 화(禍)를 당하지는 않았다. <무오사화>는 훈구파(勳舊派)가 김종직(金宗直)의 사초(史草)를 문제 삼아 김종직 제자를 중심으로 하는 사림파(士林派)를 제거한 사건인데, 곽종번 형제는 김종직(金宗直)의 제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1501년(연산군 7)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되었을 때, 연산군의 비행을 말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하옥(下獄)되었다. 특히 승전(承傳) 내관(內官)이 빨리 어명(御命)을 전달하지 않는다며 벌을 주도록 청하였다가,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되었다.

1503년(연산군 9) 외직으로 나가서 인천부사(仁川府使)가 되었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자, 동생 곽종원(郭宗元)과 함께 사림파(士林派)의 잔당(殘黨)이라고 지목되면서, 체포되어 하옥되었다. 그해 5월 1일 곽종번(郭宗藩)은 동생 곽종원(郭宗元)과 함께 극형에 처해졌는데, 곽종번은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참형(斬刑)에 처해지고, 이미 참형을 당한 동생 곽종원(郭宗元)은 다시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하였다. 또 곽종번의 아들은 장형 60대를 맞고 먼 변방에 충군(充軍)되었다. <갑자사화>는 임사홍(任士洪)의 고발로 성종 때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尹氏)의 폐출에 관련된 훈구파(勳舊派) 대신들을 모조리 체포하여 극형에 처한 사건인데, 연산군의 왕비 신씨(辛氏) 일족을 중심으로 하는 궁중의 외척들이 실권을 잡기 위하여 사림파의 대간(臺諫)들도 함께 제거하였던 것이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외유내강(外柔內剛)하여 겉으로는 매우 온화하였으나, 속으로는 아주 강직하였다.

1491년(성종 22) 3월 형조에서 “중학(中學)의 유생(儒生) 오인보(吳仁輔)·유자관(庾自寬)이 훈도(訓導)곽종번(郭宗藩)을 업신여겨 욕을 한 죄는 율(律)이 결장(決杖) 80대에 해당합니다.”하고 아뢰니, 성종이 그대로 따랐다. 중학의 어린 유생들이 훈도를 업신여기고 욕을 한 것은 당시 유교사회의 기본 윤리를 어기는 큰 문제였으므로, 형조에서 왕에게 보고하고 무거운 장형(杖刑)에 처하였는데, 아마 곽종번이 겉으로 온유하고 부드러운 성품을 가졌으므로 중학의 어린 유생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외유내강(外柔內剛)의 성품을 가진 곽종번은 연산군이 비록 간언(諫言)을 듣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간관(諫官)으로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왕에게 바른 말을 서슴지 않았다. 1498년(연산군 4) 2월 사헌부 지평(持平)신복의(辛服義), 사간원 정언곽종번은 “견성사(見性寺)를 중창(重創)하는 문제에 대하여 지금 농사철을 당하여 토목(土木) 역사를 시키는 것은 궁궐을 수선한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불가한데, 하물며 무익한 승사(僧舍)를 수리하는 일이겠습니까.”하고 아뢰었으나, 연산군은 대간의 간언(諫言)을 듣지 않고 절을 짓는 역사를 강행하였다. 이에 지평신복의와 정언곽종번은 다시 “임금으로 가장 두려운 것은 만세의 공론(公論)이온데, 지금 절을 창건하는 일은 후세에 공론이 나쁠까 걱정됩니다.”하고 아뢰었으나, 연산군은 “내가 어찌 후세의 공론을 두려워하겠느냐.”라고 하며, 결국 견성사를 중창하였다.

묘소와 후손

곽종번은 <갑자사화> 때 군기시(軍器寺) 앞에서 참형(斬刑)을 받았기 때문에 시신을 수습할 수 없었으므로 묘소를 만들었는지 알 수 없다.

부인 이씨(李氏)는 이지(李漬)의 딸인데,[<문과방목>] 슬하에 아들이 있었다, <갑자사화> 때 아들은 장(杖) 60대를 맞고 먼 변방에 충군(充軍)되었으나, <중종반정(中宗反正)> 직후인 1506년(중종 1) 나라에서 아들을 석방하고 벼슬을 내려주었다.[『중종실록』 1년 10월 2일 10번째기사]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기년편고(紀年便攷)』
  • 『기언(記言)』
  • 『미수기언(眉叟記言)』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음애집(陰崖集)』
  • 『인천부읍지(仁川府邑誌)』
  • 『재사당일집(再思堂逸集)』
  • 『허백정집(虛白亭集)』
  • 『허암유집(虛庵遺集)』
  • 인천광역시, 『인천광역시사』,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