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제화(郭齊華)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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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곽제화 |
한글표제 | 곽제화 |
한자표제 | 郭齊華 |
분야 | 인물 |
유형 | 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효종~숙종 |
집필자 | 최양규 |
자 | 중망(仲望)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625년(인조 3) |
사망 | 1675년(숙종 1) |
본관 | 해미(海美) |
주거지 | 전라도 영암(靈巖) |
묘소소재지 |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대월리 |
증조부 | 곽기수(郭期壽); 문과 급제, 예조 좌랑(佐郎) |
조부 | 곽치요(郭致堯); 생원(生員) |
부 | 곽성구(郭聖龜); 문과 급제, 사헌부 헌납(獻納) |
형제 | (동생) 곽제항(郭齊恒): 진사(進士) |
처_장인 | 홍씨(洪氏); 홍명현(洪命顯)의 딸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곽제화(郭齊華) |
총론
[1625년(인조 3)∼1675년(숙종 1) = 51세]. 조선 후기 효종~숙종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사간원 사간(司諫), 사헌부 장령(掌令)이다. 자(字)는 중망(仲望)이다. 본관은 해미(海美)이고, 거주지는 전라도 영암(靈巖)이다. 아버지는 사헌부 지평(持平)곽성구(郭聖龜)이다. 예조 좌랑곽기수(郭期壽)의 증손자이다. 서인(西人) 출신의 대간(臺諫)으로서 효종과 현종에게 직언(直言)을 서슴없이 하다가, 여러 차례 수난을 당하였다.
효종 시대 활동
1650년(효종 1) 사마시(司馬試) 생원과(生員科),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고,[<사마방목>] 바로 그해 증광(增廣)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6세였다.[<문과방목>]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면서, 춘추관의 사관(史官)을 겸임하였다. 그때 효종은 <병자호란> 때 당한 국치를 설욕하고자 하여, 척화파(斥和派) 김상헌(金尙憲) 등과 협의하여, 김집(金集)의 제자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을 등용하여 청(淸)나라를 정벌할 계획을 세웠다.
1651년(효종 2) <김자점(金自點)의 옥사>가 일어났는데, 친청파(親淸派)인 영의정김자점이 효종의 <북벌(北伐) 계획>을 청나라에 고자질하였기 때문이다.
1652년(효종 3) <김자점의 옥사>를 다스릴 때, 추국청(推鞫廳)에 참여하여 사관(史官)으로서 사실을 잘 기록하였다고 하여, 사관 목내선(睦來善) 등과 함께 반숙마(半熟馬) 1필을 하사받았다. 이때부터 곽제화는 송시열⋅송준길을 적극 지지하여 대간(臺諫)으로 활동하였으나, 당쟁에 휩쓸리지 않고 정론(正論)을 펴고자 노력하였다. 아버지 곽성구(郭聖龜)도 아들 곽제화와 함께 부자가 대간의 청요직(淸要職)에 있었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이 몹시 부러워하였다.
1655년(효종 6)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가, 1656년(효종 7) 사간원 정언(正言)으로 전임되었다. 당시 천재지변이 심한데도 불구하고 효종이 궁궐을 수리하는 공사를 강행하자, 지평곽제화가 대사헌홍명하(洪命夏)⋅집의성하명(成夏明)와 함께 이를 비판하였는데, 결국 효종의 노여움을 사서 체직(遞職)되었다. 의정부 대신들이 곽제화를 변호하자, 효종은 “내가 어찌 곽제화를 유독 미워할 리가 있겠는가. 대간의 사체(事體)는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의 직임을 체임시켰다.”고 하였다.
1657년(효종 8) 다시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고,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정사(正使)윤강(尹絳), 부사(副使)이석(李晳)과 함께 중국 청나라 서울 연경(燕京)에 갔다가 돌아왔다.
1658년(효종 9) 사간원 정언(正言)에 되었다가,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현종 시대 활동
1659년(현종 즉위) 효종이 돌아가고 현종이 즉위한 후, 조대비(趙大妃)의 복제(服制) 문제를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 사이에 제1차 예송(禮訟)이 일어났을 때 곽제화는 서인 송시열⋅송준길의 주장인 기년설(朞年說: 1년 상복)을 적극 지지하였다.
1660년(현종 1)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었는데, 지평곽제화가 개성유수(開城留守)남노성(南老星)의 잘못을 논핵하면서 파직시키기를 청하였으나, 현종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현종의 비답이 엄했기 때문에 지평곽제화와 동료 대간들이 잇달아 인피(引避)하였다.
1661년(현종 2) 사간원정언이 되었다가, 1662년(현종 3) 사헌부 지평을 거쳐, 사헌부장령(掌令)으로 승진하였는데, 경연의 시독관(試讀官)이 되어 현종에게 『대학연의(大學衍義)』를 진강(進講)하며 왕을 훌륭한 군주로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1663년(현종 4) 장령곽제화가 현종에게 대간의 바른 말을 듣기 싫어한다고 직언(直言)하다가, 현종의 노여움을 사서 함경도경성판관(鏡城判官)으로 좌천되었다. 사헌부와 사간원의 양사(兩司)에서 합사(合辭)하여 곽제화를 변호하고 구원하려고 하였으나 현종은 빨리 부임하라고 엄명하였다. 곽제화는 경성판관에 부임하였으나 월과(月課) 제술(製述)을 계속 세 번이나 짓지 않았다고 하여, 파직된 후, 본읍(本邑)에 충군(充軍)되었다. 당시 문신(文臣)들은 매달 문장을 지어서 홍문관에 보냈는데, 이것이 문신(文臣)들에게 제술(製述)을 장려하기 위한 정책의 하나인 월과(月課) 제술(製述)이었다. 이때 곽제화는 함경도 두만강의 경성(鏡城)에서 국경을 파수하는 군인으로 충군되어, 많은 고초를 겪었다.
1664년(현종 5) 영의정정태화(鄭太和)가 곽제화를 방면해 줄 것을 청하자, 현종이 마지못하여 그를 방면시켜주었다. 이때 대사헌송준길(宋浚吉)은 현종에게 경연(經筵)을 폐지하지 말고 곽제화와 같은 문신을 경연관으로 임명할 것을 건의하였다.
1664년(현종 6) 아버지 곽성구(郭聖龜)의 상(喪)을 당하여, 전라도 강진의 선영(先塋)에서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였다. 그 뒤에 10년 동안 고향 강진에서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학문을 연구하며 조용히 지냈다.
1674년(현종 15) 효종의 왕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돌아가자, 다시 조대비(趙大妃)의 복제(服制) 문제를 둘러싸고 서인(西人)과 남인(南人) 사이에 제2차 예송(禮訟)이 일어났는데, 곽제화는 서인 송시열⋅김수항(金壽恒)의 대공설(大功說: 8개월 상복)을 지지하였다.
숙종 시대 활동
1675년(숙종 1) 다시 서용되어 사간원 헌납(獻納)에 임명되었다가, 사간원 사간(司諫)으로 승진하였고, 사헌부 집의로 전임되었다. 진주 유생 곽세건(郭世楗)이 “송시열이 예를 잘못 인용하여, 효종과 현종의 적통(嫡統)을 그르쳤다.”고 공격하면서, 숙종이 송시열을 덕원(德源)으로 귀양 보내는 일이 발생하자, 이에 충격을 받은 송제화도 갑자기 돌아갔는데, 향년이 51세였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바르고 강직하였는데, 대간이 되어 바른 소리를 하다가, 효종과 현종 때 여러 차례 어려움을 겪었다.
1662년(현종 3) 5월 사헌부 지평을 거쳐, 그해 9월에 사헌부장령으로 승진하였는데, 경연 시독관으로서 진강에 참여하여 현종을 계도(啓導)하여 훌륭한 군주로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그해 10월 경연에서 『대학연의』 홍범편을 진강하였다. 현종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서 소대(召對)하였는데, 도승지남용익(南龍翼), 홍문관 교리(校理)김만기(金萬基), 수찬(修撰)오시수(吳始壽)와 장령곽제화(郭齊華)가 입시하였다. 이때 장령곽제화가 시독관으로서 『대학연의』의 홍범편의 끝장을 읽었고, 홍문관 교리김만기와 수찬오시수가 번갈아가며 그 내용을 진강하였다. 이때 심한 기침 감기가 들었던 현종은 경연을 그만두고 싶어 하였으나, 장령곽제화는 임금은 덕성을 함양하기 위하여 경연의 공부를 게을리 하면 안 된다고 역설하였다. 이에 현종은 짜증을 내면서 “내가 해수기침 때문에 강독할 수가 없으니, 그대들이 그 글의 뜻만을 간단명료하게 진강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결국 김만기가 그 글의 뜻을 열심히 강론하니, 현종이 애써 경청하는 척하였다. 이어서 김만기가 현종에게 아뢰기를, “신이 대강 글의 뜻을 진강하기는 했습니다만, 그 상수(象數)에 대해서는 전혀 까마득히 모르는 형편입니다.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이 이에 대하여 정밀하게 알고 있으며, 현재 조정에 있는 신하 중에는 오직 유계(兪棨)만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수(象數)는 태극(太極)의 8괘(卦)에 대한 음양 이론인데, 이것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송시열⋅송준길과 유계⋅윤선거(尹宣擧: 윤증의 아버지) 정도였는데, 모두 서인이었다.
당시 송시열과 송준길은 벼슬에서 물러나 충청도 회덕(懷德)에서 윤증(尹拯) 등의 후진을 양성하고 있었고, 윤증의 아버지 노서(魯西) 윤선거(尹宣擧)는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부인이 순절한 이후에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충청도 금산(錦山)에 서실(書室)을 짓고, 친한 친구 시남(市南) 유계(兪棨)를 초치하여 『가례원류(家禮源流)』를 지었다. 현종 때 예송(禮訟) 논쟁이 일어나면서, 서인의 송시열과 남인의 윤휴(尹鑴)가 서로 싸울 때 윤선거는 윤휴의 견해를 옹호하다가, 송시열과 대립하게 되었는데, 송시열은 윤선거가 강화도에서 자결하지 않고 살아 돌아온 것을 비난하였다. 윤선거가 죽은 뒤에 그 아들 윤증이 스승 송시열에게 아버지의 비명(碑銘)을 청탁하였는데, 송시열이 비명에 죽은 윤선거를 비판하는 글을 쓰면서 윤증과 송시열 간에 감정이 격화되어, 서인이 송시열을 지지하는 노론과 윤증을 지지하는 소론으로 분당되었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대월리의 선영(先塋)에 있다.
부인 홍씨(洪氏)는 홍명현(洪命顯)의 딸이다.
참고문헌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기언(記言)』
- 『남계집(南溪集)』
- 『동춘당집(同春堂集)』
- 『명재유고(明齋遺稿)』
- 『서하집(西河集)』
- 『수곡집(睡谷集)』
- 『시남집(市南集)』
- 『양곡집(陽谷集)』
- 『연도기행(燕途紀行)』
- 『운포유고(雲浦遺稿)』
- 『잠곡유고(潛谷遺稿)』
- 『정관재집(靜觀齋集)』
- 『직재집(直齋集)』
- 『추담집(秋潭集)』
- 『팔송집(八松集)』
- 『하곡집(霞谷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