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시(郭詩)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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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곽시 |
한글표제 | 곽시 |
한자표제 | 郭詩 |
분야 | 인물 |
유형 | 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중종 |
집필자 | 최양규 |
자 | 영이(詠而) |
호 | 탄암(坦菴)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본관 | 선산(善山) |
주거지 | 옥천(沃川) |
묘소소재지 | 옥천(沃川) |
증조부 | 곽기(郭琦) |
조부 | 곽은(郭垠) |
부 | 곽지한(郭之翰) |
모_외조 | 정씨(鄭氏); 정승순(鄭承順)의 딸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곽시(郭詩) |
총론
[생몰 연대 미상.] 조선 중기 중종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승문원 정자(正字)이다. 자(字)는 영이(詠而)이고, 호(號)는 탄암(坦菴)이다. 본관은 선산(善山)이고, 거주지는 충청도 옥천(沃川)이다. 아버지는 곽지한(郭之翰)이고, 어머니 정씨(鄭氏)는 정승순(鄭承順)의 딸이다. 성종 때 담양부사(潭陽府使)를 지내다가, 승정원 승지(承旨)에 발탁된 용촌(龍村) 곽은(郭垠)의 손자이다.
중종 시대 활동
1522년(중종 17)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는데,[<사마방목>] 그때 나이가 20여 세에 지나지 않았다. 문장으로 이름을 날린 그는 문우(文友)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시(詩)와 잡문(雜文)을 지었다. 당시 성리학자들은 주자(朱子)와 그의 스승 정자(程子)를 높이 받들었는데, 곽시는 정이(程頤: 정자)를 비판하는 글을 지었다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분노를 샀다.[『송자대전(宋子大全)』 권72] 그러므로 과거를 위한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대과(大科)에 거듭 실패하였다.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지 17년이 지난 1539년(중종 34)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문과방목>] 승문원 권지(權知) 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 그러나 술로 인하여 병이 생기면서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하고 고향 옥천으로 돌아가서 지내다가, 갑자기 관문(官門) 앞에서 쓰러져 돌아갔다.[『기축록 속(己丑錄續)』]
성품과 일화
성품이 강직하여 불의를 멀리하였다.
곽시는 일찍부터 문명(文名)을 떨쳤으므로, 수많은 문우(文友)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시문(詩文)을 지었기 때문에 충청도 옥천(沃川)을 대표하는 문장가로 널리 알려졌다. 곽시는 할아버지 곽은(郭垠)처럼 집의(執義)나 헌납(獻納)과 같은 현직(顯職)을 역임하지 못하고, 과거에 급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고향으로 돌아와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재주를 아까워한 옥천의 유림(儒林)에서는 곽시를 제향하는 서원(書院)이나 사우(祠宇)를 세우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1571년(선조 4) 옥천의 유림에서 서원(書院)을 세워 곽시를 향사하였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서원이 불타 없어졌다. 1621년(광해군 13) 나라에서 임진왜란 때 옥천(沃川)에서 의병을 일으켜 크게 활약했던 의병장 조헌(趙憲)을 제향하기 위하여 표충사(表忠祠)를 세웠는데, 옥천의 유림(儒林)들이 중봉(重峯) 조헌과 함께 옥천 출신의 목사(牧使)전팽령(全彭齡)과 승문원 정자(正字)곽시(郭詩)를 함께 제향하였다.
당시 옥천의 유림들이 표충사에 전팽령⋅곽시⋅조헌의 신위(神位)를 시대 순으로 배열하고 제향하자,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제자 김약(金鑰)은 “우리 선생님은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절의가 해와 별처럼 빛나지만, 전팽령과 곽시는 특별히 드러난 행실이 없는데, 어찌 윗자리에 있을 수 있겠는가.”라며 불평하였다. 또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제자인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과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은 곽시가 생전에 정자(程子)를 비판하는 글을 지었다고 하여 표충사에 중봉(重峯) 조헌(趙憲)과 함께 배향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또한 전팽령(全彭齡)은 역적 정여립(鄭汝立)의 일당이라고 하여, 곽시와 함께 출향(黜享: 배향에서 제외시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1638년(인조 16) 충청도 감사김육(金堉)이 전팽령과 곽시를 표충사의 배향에서 출향(黜享)시켜버렸다.[『잠곡유고(潛谷遺稿)』 권8]
1682년(숙종 8) 표충사를 창주서원(滄洲書院)으로 바꿀 때 곽시의 조부 곽은(郭垠)은 조헌과 함께 배향되었으나, 곽시는 출향(黜享)되었다. 이에 숙종 때 옥천의 유림들이 곽시를 향사하기 위해 따로 사우(祠宇)를 세웠다.[『중봉집(重峰集)』 부록 권7]
묘소와 후손
묘소는 충청도 옥천(沃川)에 있다.
참고문헌
- 『효종실록(孝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계곡집(谿谷集)』
- 『고산집(鼓山集)』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규창유고(葵窓遺稿)』
- 『금곡집(錦谷集)』
- 『기축록 속(己丑錄續)』
- 『낙하생집(洛下生集)』
- 『노봉집(老峯集)』
- 『동춘당집(同春堂集)』
- 『문곡집(文谷集)』
- 『번암집(樊巖集)』
- 『사계유고(沙溪遺稿)』
- 『사계전서(沙溪全書)』
- 『사우당집(四友堂集)』
- 『서원등록(書院謄錄)』
- 『송봉유고(松峯遺稿)』
- 『송자대전(宋子大全)』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옥수집(玉垂集)』
- 『우득록(愚得錄)』
- 『우원집(愚園集)』
- 『운와집(芸窩集)』
- 『월곡집(月谷集)』
- 『잠곡유고(潛谷遺稿)』
- 『장암집(丈巖集)』
- 『중봉집(重峰集)』
- 『지호집(芝湖集)』
- 『초려집(草廬集)』
- 『침계유고(梣溪遺稿)』
- 『타우유고(打愚遺稿)』
- 『학암집(鶴庵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