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장난입률(科場闌入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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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응시할 자격이 없는 자, 혹은 정해진 절차를 밟지 않은 자가 함부로 과거 시험장에 들어가는 행위에 대하여 죄를 묻는 법률.

개설

조선시대에 과거를 응시하기 위해서는 녹명(錄名)이라고 하여 자신의 신분을 밝히는 응시원서를 제출하였다. 녹명의 시한은 시험 10일 전에 녹명소에서 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과장에 들어갈 때 하는 일이 많았다. 응시자들은 녹명소에 먼저 사조단자(四祖單子)와 보단자(保單子)를 제출해야 하였다. 사조단자는 응시자 및 그 아버지·할아버지·외할아버지·증조할아버지의 관직과 성명·본관·거주지를 장백지(壯白紙)에 기록한 것이었다. 보단자는 일명 보결(保結)이라고도 하는데, 6품 이상의 조관(朝官)이 서명 날인한 신원 보증서였다. 녹명관은 사조단자와 보단자를 접수한 다음 응시자의 사조 중 『경국대전』에 규정한 결격 사유가 없는지를 살펴보고 이상이 없을 때 녹명책에 기입하였다. 그러나 검토 과정에서 시험 응시 자격에 문제가 있을 경우 과거 시험장에 들어간 응시자를 다시 잡아내어 과장을 어지럽혔다는 죄를 물어 처벌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조선시대에 과거 응시 자격은 법제상으로는 천인이 아니면 결격 사유가 없는 이상 누구나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기술관을 뽑는 잡과의 경우도 천인만 아니면 누구나 응시할 수 있었다. 다만 양반 신분이라 하더라도 다음과 같은 결격 사유가 있는 자는 응시할 수 없었다. 즉, 중죄인의 자손, 죄를 지어 파면된 관원, 범죄를 저질러 영영 관직에 임명될 수 없다는 판정을 받은 자, 현직 관료로서 범죄인에 대한 재판을 일부러 질질 끄는 자와 고문하여 치사(致死)하게 한 자, 공물을 대납(代納)하는 자, 산사(山寺)에 올라가 말썽을 부리는 유생 등에게는 문과에 응시할 자격을 주지 않았다. 또한 재가녀(再嫁女) 및 행실이 바르지 못한 부녀의 자손과 태종대 만들어진 서얼금고법(庶孼禁錮法)에 의하여 서얼(庶孼)은 영원히 금고되어 문과나 생원진사시에 응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1553년(명종 8)에 양민 출신의 첩 자손에 한하여 손자 때부터 문과와 무과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고, 1625년(인조 3)부터는 천첩(賤妾) 자손도 증손자 때부터 응시할 수 있었다. 위와 같은 과거 응시 사전 자격 제한을 미처 확인하지 않고 과거 시험장에 들어와 시험을 볼 경우 과장난입률(科場闌入律)에 의하여 처벌하였다(『명종실록』 11년 2월 4일).

내용

다양한 이유로 과거에 응시할 자격이 없는 자, 혹은 정해진)절차를 밟지 않은 자가 함부로 과거 시험장에 들어가서 시험을 보다가 발각될 경우 과장 난입자는 신분을 강등시켜 수군으로 보내고 관학제와 각 도의 공도회에 난입한 자는 장형 100대, 도형 3년으로 죄를 물었다.

변천

과장난입률은 신분 질서 변동에 따라 죄의 유무가 달랐다. 아버지는 양반이나 어머니는 천인 출신인 서얼이 대표적으로 과장난입률에 의한 죄를 받았다. 1625년(인조 3)에 『허통사목(許通事目)』이 제정되어 양첩자(良妾子)는 손자, 천첩자(賤妾子)는 증손자 때부터 허통이 가능하게 되었다. 여기서 제외된 양첩자의 아들, 천첩자의 아들·손자는 굶주린 백성들의 구제를 위한 진자곡(賑資穀) 마련 등을 위하여 수시로 실시한 납속책을 통하여 허통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인조대 이전에는 서얼이 과거 시험을 볼 경우 과장난입률로 죄를 받아야만 했다. 그러나 허통한 후에도 서얼은 과거에 응시할 수는 있었지만, 반드시 응시원서인 녹명에 허통으로 자신의 신분을 밝히도록 하여 신분상의 제약이 따랐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대전회통(大典會通)』
  •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
  • 『추관지(秋官志)』
  • 법제처, 『고법전용어집』, 육지사, 1981.
  • 이성무, 『한국의 과거제도』, 한국일보사, 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