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험진(公險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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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예종대 윤관(尹瓘)이 동북 지방의 여진족을 공격하여 축출하고 새로이 개척하고 쌓은 9성 중의 하나.

개설

12세기 초 고려 예종대인 1107년(고려 예종 2) 12월 윤관(尹瓘)을 원수로,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로 하는 고려의 17만 대군이 동북 지방의 여진족에 대해 전면적인 공격을 하여 이들을 소탕 축출하고 흑수여진의 거주지역인 갈라전 일대를 점령하였다. 윤관은 이 지역에 우선 웅주, 영주, 복주, 길주의 네 성을 쌓고 이듬해 2월에는 함주를 대도호부, 그리고 위의 4주와 공험진을 방어주진(防禦州鎭)으로 편제하였으며 이어서 3월에 의주와 통태진, 평융진에도 성을 쌓고 9성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남쪽 지방의 주민들을 이주시켜 이 지역을 고려의 행정체계로 완벽히 편입시켰다.

9성에 대한 확보 및 설치를 마친 윤관은 1108년(고려 예종 3) 4월 개경으로 개선하였으나 근거지를 잃은 여진족인 완안부를 중심으로 조직적인 무력 충돌을 펴면서 전세가 불리해졌다. 이에 윤관과 오연총이 다시 출정하였지만 고전을 면치 못하는 가운데 여진 쪽에서 9성을 다시 돌려줄 것을 요청하였으므로 고려는 여러 차례의 논의를 거쳐 이듬해인 1109년(고려 예종 4) 7월 여진에게 돌려줄 것을 결정하고 곧 철수하게 된다. 9성 지역을 여진족에게 넘겨준 이후 완안부의 세력은 더욱 커져 금나라를 건국하고 이어서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송나라를 남쪽으로 밀어내면서 이후 몽골이 등장하기 전까지 한동안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자리 잡게 되었다.

조선시대 들어 9성은 동북지방을 개척하고자 할 때 역사적 근거로서 주목받았다. 특히 세종대 북방 개척의 과정에서 공험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에 대한 조사를 하고 아울러 관련 기록을 『세종실록』「지리지」에 수록하였다. 또한 북진개척의 의지로 표명되기도 했다(『세종실록』 19년 8월 6일). 이후 조선의 모든 관찬 도서와 기록에는 공험진의 소재를 두만강 북쪽 700리(약 275㎞)에 선춘령(先春嶺)과 함께 존재한 것으로 기록하고 주기하였다. 조선후기 들어 공험진을 길주 이남 지역이나 함흥평야 일대로 보는 시각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위치 및 용도

공험진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이 있는데 먼저 공험진을 두만강 이북으로 잡아 그 이남으로부터 정평까지의 함경도 일대에 있었다는 설, 둘째 길주 내지 마운령 이남부터 정평까지 주로 함경남도 일대로 비정하는 설, 셋째 함관령(咸關嶺) 이남 정평 이북의 광의적인 함흥평야 일대로 보는 설 등이 그것이다. 길주 이남설에 따르면 공험진이 마운령과 마천령 사이에 존재하는 것으로 비정하였고, 함흥평야설에 따르면 함흥군 대덕리산성 또는 함흥군 상대리산성으로 비정하기도 하였다.

한편 두만강 이북설을 기록한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공험진에는 내외 방어소를 두었는데 내방어소는 경원도호부 자리에, 외방어소는 두만강 북쪽 700리에 위치한 공험진에 두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주민 5,000호가 있었다고 한다. 「영주청벽기」에 의하면 선춘령 동남, 백두산 동북에 있었다고 하며 또는 소하강변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백두산 이북 오늘날의 연변 조선족 자치주 북방의 어느 지역으로 조선초기에 인식하고 있었던 점은 분명하다.

변천 및 현황

1109년 여진에게 9성을 돌려준 이후 이 지역은 여진족의 판도로 남아 있게 되었다. 이후 고려말 조선초에 걸쳐 북방 영토에 대한 강한 영토의식이 나타나기 시작하면서 이 지역을 적극적으로 인식하고자 하는 인식이 대두하였다.

세종대에는 공험진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관리를 파견하여 직접 조사하였는데 그 관련된 기록이 『세종실록』「지리지」에 남아 있다. 이에 의하면 그 노정은 조선 초기의 경원도호부의 동림성을 출발하여 북쪽 5리(약 2㎞)쯤에 소다로영(所多老營), 그 북쪽 30리(약 12㎞)에 어두하현(於豆下峴), 그 북쪽 60리(약 24㎞)에 동건리(童巾里), 그 북쪽 3리쯤(약 1㎞)에 두만강탄(豆滿江灘), 그 북쪽 90리(약 35㎞)에 오동사오리참(吾東沙吾里站), 그 북쪽 60리에 하이두은(河伊豆隱), 그 북쪽 100리(약 39㎞)에 영가사오리참(英哥沙吾里站), 그리고 그 북쪽 소하강(蘇下江) 강변에 공험진이 있다고 조사하였다.

형태

윤관이 개척한 9성은 『고려사』에 인용된 「영주청벽기(英州廳壁記)」에 의하면 사방 300리(약 118㎞)에 이르는 상당히 넓은 땅으로 동으로는 대해(大海)에 미치고 서북으로는 개마산을 끼고 있으며 남으로는 장주, 정주와 접하였다고 기록하고 본래 고구려가 소유하였던 지역으로 표현하고 있다. 공험진은 내외 방어진이 있었는데 공험진의 외방어소 지역은 군사지역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공험진은 일명 공주(孔州)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관련사건 및 일화

세종대 공험진에 대한 관심은 조선초기의 북방 영토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을 반영한 것으로 한동안 두만강 이북설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이후 공험진에 위치에 대해 학자들의 다양한 견해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길주 이남설은 17세기 초 한백겸이 그의 저서 『동국지리지』에서 마운령 꼭대기의 진흥왕순수비를 막연히 윤관의 정계비일 것으로 의문을 제기한 이후 정약용 등이 이를 지지하면서 확산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에 의해 함흥평야설이 제기되었는데, 이들은 현지를 조사하고 아울러 식민사관의 입장에서 9성의 범위를 최대한 좁히려는 입장에서 주장한 것이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 김광수, 「고려전기 대여진교섭과 북방개척문제」, 『동양학』7,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1977.
  • 김구진, 「공험진과 선춘령비」, 『백산학보』21, 백산학회, 1976.
  • 방동인, 「고려의 동북지방경역에 관한 연구-특히 윤관의 구성설치범위를 중심으로-」, 『영동문화』창간호, 관동대학교 영동문화연구소, 19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