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신문(拱辰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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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후원 북쪽 담장에 있던 문.

개설

공신문(拱辰門)은 태종 때에 건립된 창덕궁 후원(後苑)의 북쪽 담장에 있던 문이다. 1776년(정조 즉위)에 주합루(宙合樓)·서향각(書香閣)·봉모당(奉謨堂)·불운정(拂雲亭) 등의 건물로 규장각 영역을 만들면서 해당 영역의 서북쪽 담장의 문이 되었다. 공신문은 대보단(大報壇) 의례 및 춘당대(春塘臺) 시사(試射)를 위하여 왕이 내전(內殿) 영역을 나설 때 주로 이용되었는데,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위치 및 용도

공신문은 주합루 서쪽에 건립되었던 서고(西庫) 및 수직간(守直間)을 둘러싼 담장에 설치된 문이다. 왕이 대보단이나 춘당대에 나갈 때 출입용으로 사용했다.

변천 및 현황

공신문은 창덕궁의 조성과 함께 세워진 것으로 후원의 북장문(北墻門)이다(『성종실록』 6년 8월 23일). 후원은 궁궐의 영역이긴 하지만, 조선전기에는 이곳까지 일반 백성들이 들어와 왕이 종종 놀라는 일이 발생했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던 궁을 수리하고 창덕궁에 들어와 지내던 광해군은 잡인(雜人)이 공신문 근처까지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해당 지역을 수직하던 군사들에게 죄를 묻는 한편 별장(別將)을 특별히 골라 임명하도록 명을 내리기도 했다(『광해군일기』 14년 4월 23일).

공신문은 숙종대에 창덕궁의 북서쪽에 대보단(大報壇)을 조성하면서 그 사용이 더 잦아졌다. 특히 정조는 대보단 및 경모궁(景慕宮)에 전배(展拜)하러 가기 전에 주합루의 동북쪽에 있는 이문원(摛文院)에서 재숙(齋宿)하였는데, 이때 공신문을 거쳐 출궁(出宮)하였다. 또 춘당대 시사(試射)에 임어(臨御)할 때도 공신문을 사용했다. 이와 같은 공신문의 기능은 창덕궁이 그 기능을 상실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현재 공신문이 있던 곳은 궁궐 내부 순환로로 변하여 위치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다.

형태

공신문은 현재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그 건축적 형태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동궐도(東闕圖)」나 「규장각도(奎章閣圖)」를 통해서 대강의 형태는 추정할 수 있다. 이 두 그림에 그려진 공신문은 담장에 낀 일각문(一角門)으로 기둥과 문짝은 붉은 칠하여 단청하고 지붕은 맞배에 기와를 얹은 형태이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궁궐지(宮闕志)』
  • 『규장각지(奎章閣志)』
  • 『내각일력(內閣日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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