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孔俯)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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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공부 |
한글표제 | 공부 |
한자표제 | 孔俯 |
분야 | 인물 |
유형 | 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고려~조선 |
왕대 | 우왕~태종 |
집필자 | 이현숙 |
자 | 백공(伯恭) |
호 | 어촌(漁村)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352년(공민왕 1) |
사망 | 1416년(태종 16) |
본관 | 곡부(曲阜) |
주거지 | 안의(安義) |
조부 | 공소(孔紹) |
부 | 공노(孔帑) |
형제 | (형) 공백(孔伯) (동생) 공숙(孔俶) |
자녀 | (1자) 공달(孔達); 종부시 판관(宗簿寺判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공부(孔俯) |
총론
[1352년(공민왕 1)∼1416년(태종 16) = 65세.] 고려 말~조선 전기 우왕~태종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인녕부윤(仁寧府尹)이다. 자(字)는 백공(伯恭)이고, 호(號)는 어촌(漁村)이다. 본관은 곡부(曲阜)이고, 거주지는 안의(安義)이다. 아버지는 공노(孔帑)이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목은(牧隱) 이색(李穡) 등과 교유하였다.
우왕 시대 활동
1376년(우왕 2) 병진방(丙辰榜) 병과(丙科)로 급제하여[<고려문과방목>] 전의부령(典儀副令)과 예조총랑(禮曹摠郎)을 거쳐서 집현전 태학사가 되었다.
태조 시대 활동
조선이 개국한 이후, 1398년(태조 7) 성균관 사성(司成)과 성균관 좨주(祭酒)를 역임하였다.
태종 시대 활동
1402년(태종 2) 사윤(司允)이 되었고, 1407년(태종 7) 검교 한성부윤(檢校漢城府尹)이 되었다.
1407년(태종 7) 소격전 제조(提調)를 겸임하고 있던 그는 태종의 명을 받고 명나라에 가서 중국 도가(道家)의 초사법(醮祀法)을 배워왔는데, 모두 6번이나 중국을 다녀왔다.
1416년(태종 16) 인녕부윤(仁寧府尹)이 되었는데, 그해 천추사(千秋使)로서 명나라에 파견되었다가, 7월 29일 병으로 남경(南京)의 회동관(會同館)에서 객사하였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너그럽고 솔직하며 우스갯소리[詼諧]를 좋아하였으나, 청렴하고 조용하며 욕심이 적어서 물건을 가지고 다투는 일이 없었으므로 세상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오직 도가(道家)를 몹시 좋아하여 평소에 별호를 ‘수선(修仙)’이라고 하였다. 1416년(태종 16) 남경 회동관에 머무를 때 병이 심해지자, 도사(道士)를 청하여 초제(醮祭)를 베풀었는데, 명등(命燈)이 꺼지자, 도사가 ‘병이 낫지 못하겠다.’고 탄식하였다. 공부의 뼈를 태우자 갑자기 풍우(風雨)가 닥치니, 사람들이 모두 이상히 여겼다.[『태종실록』 16년 10월 7일 2번째기사]
시(詩)를 잘 지었으며, 초서(草書)와 예서(隷書)에도 매우 능하였는데, 그의 필적(筆蹟)을 얻는 사람은 이를 보화(寶貨)로 여겼다. 양주의 회암사(檜巖寺)에 있는 묘엄존자무학선사탑비(妙嚴尊者無學禪師塔碑)와 한산에 있는 한산군이색신도비(韓山君李穡神道碑)가 그의 필적이다.
후손
슬하에 1남을 두었는데, 장남은 종부시 판관(判官)을 지낸 공달(孔達)이다.
참고문헌
- 『태조실록(太祖實錄)』
- 『태종실록(太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
- 『독곡집(獨谷集)』
- 『동국궐리지(東國闕里志)』
- 『동사강목(東史綱目)』
- 『목은집(牧隱集)』
- 『무명자집(無名子集)』
- 『삼봉집(三峯集)』
- 『식산집(息山集)』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암서집(巖棲集)』
- 『양촌집(陽村集)』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완당전집(阮堂全集)』
- 『용헌집(容軒集)』
- 『임하필기(林下筆記)』
- 『청파극담(靑坡劇談)』
- 『치평요람(治平要覽)』
- 『포은집(圃隱集)』
- 『형재시집(亨齋詩集)』
- 이능화, 『조선도교사』, 동국대학교출판부, 19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