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자(骨者)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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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골자 |
한글표제 | 골자 |
한자표제 | 骨者 |
동의어 | 고차(高且), 고가(高哥), 골자(骨子) |
관련어 | 정묘호란(丁卯胡亂), 채삼(採蔘) |
분야 | 정치/외교/외교사안 |
유형 | 인물 |
지역 | 중국 |
시대 | 명·청/조선 |
왕대 | 명·청/조선 |
집필자 | 이선애 |
성별 | 남 |
몰년/일 | 1633년 |
본관 | 해서여진 하다([哈達], hada)부 |
가족관계(부,조,외조[모], 장인[처], 형제) | 조부: 뇌로혼(賴盧渾), 부: 색탑란(索塔蘭)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골자(骨者)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인조실록』 5년 2월 9일, 『인조실록』 5년 8월 6일, 『인조실록』 9년 윤11월 21일, 『인조실록』 9년 윤11월 22일, 『인조실록』 9년 윤11월 24일, 『인조실록』 9년 12월 24일, 『인조실록』 10년 11월 17일 |
청 태조누르하치의 외손자로서 한문에 능통하였던 문관인 니오후루([鈕祜祿], niohuru) 씨 쿠르찬([庫爾纏, 庫爾禪], kūrcan)의 한자 이름.
개설
쿠르찬은 문관으로 현저한 공적을 세웠으나 전공도 적지 않았으며 특히 외교 부문에서 크게 활약한 인물이었다. 1601년 쿠르찬은 니루 어전에 임명되었고, 1615년에는 양홍기(鑲紅旗)에 편입되었다. 1616년 누르하치가 후금(後金)을 건국한 뒤에는 문관(文館)의 사무를 보게 되었고 1631년에는 박시([巴克什], baksi)에 임명되었다. 1619년과 1624년에는 각각 칼카([喀尔喀], kalka) 몽골과 코르친([科尔沁], korcin) 몽골에 파견되어 결맹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정묘호란 때에는 강화도에서 유흥조(劉興祚)와 함께 인조를 접견하고 화맹의 추진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1631년에는 조선에 출사하여 변경에서의 인삼 채취 문제와 명과의 밀통 문제를 처리하였다. 1633년 반신(叛臣) 유흥조를 비호하였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다가 1644년에 신원되었다. 조선에서는 골자(骨子) 혹은 고차(高且), 고가(高哥) 등으로도 표기하였다.
가계
조부는 뇌로혼(賴盧渾), 부친은 색탑란(索塔蘭)이었다. 뇌로혼은 해서여진 하다부의 도독이었다가 아들 색탑란과 함께 부족을 이끌고 건주여진의 누르하치에게 귀부하였다. 쿠르찬은 색탑란과 누르하치의 딸 사이에서 태어난 네 아들 중 둘째였다. 아들로 마라([馬喇], mala) 등이 있었다.
활동 사항
쿠르찬은 1627년 대버일러아민([阿敏], amin)을 따라 조선으로 왔다. 조선은 후금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차단하지 못하였고, 인조는 강화도로 들어갔다. 후금군은 황해도 평산(平山)에서 강화를 요구하였다. 조선에서는 강홍립의 아들 강인을 보산평에 있는 후금군 진영에 사절로 보냈는데, 이때 후금 측에서는 쿠르찬이 한인 출신의 유흥조와 함께 교섭을 담당하였다(『인조실록』 5년 2월 9일). 이후 쿠르찬과 유흥조는 강화도에 들어가 화맹을 교섭하였다.
쿠르찬은 이후에 조선과의 교섭 일선에서도 활약하였다. 1627년 7월 조선에서 회답관(回答官)으로 신경호·박난영을 보냈을 때 쿠르찬은 다하이([大海], dahai)와 함께 국서 문제를 논의하였다(『인조실록』 5년 8월 6일).
1631년 쿠르찬은 만다르한([滿達爾漢], mandarhan), 둥나미([董納密], dungnami) 등과 함께 조선에 사절로 와서 조선인의 월경(越境) 채삼(採蔘) 문제와 호시(互市) 문제, 조선과 명의 밀통 문제를 논의하였다. 쿠르찬 등이 경성에 들어오자 인조는 그들이 논의하고자 하는 사안들이 민감한 것들임을 의식하여 특별히 더욱 후대할 것을 구관소(句管所)에 명하기도 하였다(『인조실록』 9년 윤11월 21일). 이때 인조는 쿠르찬을 접견하여 홍타이지의 국서를 받았다(『인조실록』 9년 윤11월 22일). 인조는 가급적 후금의 의도를 따르고자 노력하여 후금 사신을 접견하고 이틀 뒤 쿠르찬 등이 보는 앞에서 경계를 넘어 인삼을 캔 죄로 수금되었던 죄수를 참형에 처하였다(『인조실록』 9년 윤11월 24일). 쿠르찬은 이때 주회인(走回人)들을 철저히 송환하도록 당부하기도 하였다(『인조실록』 9년 12월 24일). 다음 해 쿠르찬은 봄과 가을의 예물의 수량을 정하기도 하였다(『인조실록』 10년 11월 17일). 이는 일종의 기준이 되어 이후 조선이 그에 미달하는 품질과 양의 예물을 보냄으로써 외교적인 문제가 촉발되기도 하였다.
저술 및 작품
1629년 홍타이지에 의하여 문관에 기용되어 박시 어르더니([額爾德尼], erdeni)와 함께 『태조노당(太祖老檔)』 즉, 태조대의 『만문노당(滿文老檔)』을 편찬하였다.
상훈 및 추모
쿠르찬은 후금의 한인(漢人) 장수 유흥조와 교분이 두터웠다. 1628년 유흥조가 명으로 도주할 것이라는 의혹으로 조사를 받았을 때 그를 변호하고 보증하였다. 이후 유흥조는 명으로 도주하였다가 1630년 후금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였는데, 쿠르찬은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감추었다. 1633년 쿠르찬은 유흥조를 비호하고 조선에 사행(使行)하였을 때 재물을 착복하였다는 죄목으로 처형되었다. 쿠르찬의 죄목은 1644년 청조가 입관하여 북경으로 수도를 옮긴 이후 신원되었고, 그의 아들 마라가 호부의 낭중(郎中)으로 임명되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만문노당(滿文老檔)』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