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여(斛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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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물을 섬이나 가마로 잴 때 한 섬이나 한 가마가 되지 못해 남은 양.

개설

고려시대에는 쌀·메주[末醬]·피조[稗租]의 경우 1곡의 용량이 5말[斗]로 같았지만, 콩[大豆]·팥[小豆]의 경우에는 1곡의 용량이 절반이었다. 1446년(세종 28) 9월 신영조척(新營造尺)을 기준으로 휘[斛]·말·되[升]·홉[合] 체제를 다시 정했는데, 곡은 부피 20말과 15말의 두 가지로 구별하였다.

전세(田稅)를 거두어들이거나 환곡을 나누어 줄 때 휘에 미치지 못하여 남는 분량을 마투리[斛餘]라고 하였다(『태종실록』 17년 윤5월 28일). 전세나 환자의 운반 과정에서 원래의 액수[元數]가 모자랄 때 이 마투리로 보충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관리나 향리 등이 주로 중간에서 착복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원래의 액수에서 모자라는 액수를 다른 용도의 곡식으로 채우거나 백성에게 더 징수하여 채웠다.

내용 및 특징

곡은 ‘휘’라고도 하는데, 본래 중국 고대 이래로 사용되었던 10말에 해당되는 용량 또는 용량을 되는 용기였다. 그 뒤 송나라 때 5말로 바뀌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 정종(定宗) 무렵부터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같은 1곡이라 하더라도 쌀·메주·피조는 용량이 같았지만, 콩·팥의 경우 1곡의 용량이 쌀의 절반이었다. 성종 때 전품(田品)을 상·중·하 3등급으로 구분하여 적용하였던 차등조세법(差等租稅法)이 복잡하여 문종 때 전품에 따라 단위 면적을 달리하여 적용한 동과수조법(同科收租法)을 제정하였는데 이를 위해 이와 같이 다시 제정하였던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적으로 사용되는 말이나 되의 정식 규격을 확립하여 시행하기 위해 호조(戶曹)에서 구리로 표준규격의 곡을 주조하였다. 그런 까닭에 흔히 ‘동괵[銅斛]’이라고도 하였다. 1446년(세종 28) 9월에 신영조척을 기준으로 곡·말·되·홉 체제를 다시 정했는데, 곡은 부피 20말과 15말의 두 가지로 구별하였다(『세종실록』 28년 9월 27일). 15말 들이 1곡은 길이 2척(尺)·너비 1척·깊이 1척 4촌(寸) 5푼[分]·부피 2,940촌으로, 20말 들이 1곡은 길이 2척·너비 1척 1촌 2푼·깊이 1척 7촌 5푼·부피 3,920촌으로 각각 정하였다. 그렇지만 이 제도도 영조척(營造尺)의 변화에 따라 문란해지면서 평두법(平斗法)이 고봉법(高捧法)으로 변하여 부피의 측정이 불공평하게 되었다. 그러자 1715년(숙종 41)과 1853년(철종 4) 두 차례에 걸쳐 개정과 통일을 꾀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박흥수, 「신라 및 고려의 양전법에 관하여」, 『학술원논문집: 인문·사회과학편』 11, 1972.
  • 박흥수, 「이조 척도에 관한 연구」, 『대동문화연구』 4, 1967.